윤호정의 소설 '1950년 6월' <첫회>
윤호정의 소설 '1950년 6월' <첫회>
  • 대구신문
  • 승인 2009.06.0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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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琴川 윤호정 약력

△1942년 경북 영천 출생
△계명대 대학원
△대구경북섬유협회 전무
△주요 활동 : 계명대, 경동전문대 겸임교수.
△주요 저서 : ‘무역환경의 변화와 대구섬유의 진로(대구상공회의소)’

1. 호밀 밭에서 생긴 일(1)

오전수업이 끝날 때면 언제나 신이 났다.

일찍 집에 가봐야 특별히 맛있는 간식이나 재미있는 놀이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는 길이래야 고작 교문을 나서 국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엎어지면 무릎이 닿을 지척이지만 얼른 신주머니에서 검정고무신을 꺼내 신는데 발끝에 무언가 와 닿는 느낌이 왔다.

보나마나 영순이 이 가시나가 또 쪽지편지를 넣어놨구나 생각하면서 교실을 나와 변소 뒤쪽으로 가서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는 재빨리 꺼내 읽어보았다.

“호진아, 내일이 내 생일인데 아침 열 시까지 우리 집에 놀러 오너라, 우리엄마가 너 하고 같이 맛있는 케이크도 먹고 재미있게 놀아라 하더라, 그리고 너 줄 선물도 준비해 놨다, 꼭 와야 한다.” -영-

영순이는 작년 봄에 대구에서 강 건너 과수원으로 이사를 왔는데 세라복(해군식 여학생 복)에 란도셀(등에 메는 가죽가방)을 멘 예쁘장한 얼굴로 금호국민(초등)학교 이학년이반 우리반에 전학을 왔다.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급장(반장)인 나와 짝꿍이 되어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 했고 영순이 어머니도 양머리(퍼머머리)에 빌로드 치마 와 양단 저고리 차림으로 학교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금호장에서 나를 볼 때 마다 떡이나 엿을 사주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삼학년이 되어 모두 짝꿍이 바뀌었는데도 우리는 계속 같이 앉게 되었고 늘 하던 대로 영순이는 내 책상 안에 과자를 놔 두거나 신발 안에 편지를 넣어두곤 했다. 나는 영순이 집에 한번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부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맛있는 케이크라는 것은 뭐고 또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모처럼 누나가 쓰는 비누로 머리를 감고 가루치약으로 이까지 닦은 후 아껴 두었던 국방색(육군군복의 카키색=흙먼지 색)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와 강둑을 따라 과수원으로 가는 공구리(콘크리트)다리 쪽으로 걸어 나왔다.

강 건너에는 일제시대에 조성된 수십만 평의 과수원이 있었고 여기서 나오는 능금(사과)은 금호평야의 쌀과 함께 우리고장을 대표하는 특산물이자 부의 상징이었으며 영순이네 과수원은 이중에서도 제일 큰 축에 들어갔다.
영순이는 대문 밖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나는 혹시 안 오는가 싶었다, 열 시가 훨씬 넘었는데 왜 이제야 오니?”하며 투정을 부렸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랜만에 치장을 좀 하다가 보니 조금 늦었다, 느그 엄마 아부지는 다 집에 계시나?” “아버지는 능금조합에 급한 회의가 있어서 나갔고 엄마는 집에 있는데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 빨리 들어가자.”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과수원의 규모에 압도되어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접시꽃이 피기 시작하는 무성한 꽃밭을 지나 우리 집의 서너 배나 되어 보이는 일본식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영순이 어머니가,
“호진이는 우째 이래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 하노, 우리 영순이 하고 사이 좋게 잘 지내거라.” 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을 거리를 듬뿍 내 놓고, “내 육속간(고기 파는 집)에 가서 고기 좀 사 올게, 잘 놀고 있거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느그 집은 참 부자구나, 집도 크고 라디오도 있고 축음기도 있고, 그런데 아까 그 젊은 처자(처녀)는 누구고?”

“우리 집 식모언니 아니가, 우리엄마의 먼 친척집 딸인데 나중에 우리 집에서 시집 보내준다 카더라, 대구에 있는 우리 집은 커다란 정원도 있고 이보다 더 좋은 이층집인데 우리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다, 호진아 이거 한번 먹어봐라 정말 맛있다.” 하고 영순이가 삼지창(포크)으로 찍어 건네주는 것을 한입 베어 먹으니 이건 씹을 것도 없이 그대로 스르르 녹아 넘어가 버리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만 입안에 가득 남았다.

빵도 아니고 떡도 아닌 것이 정말 희한한 맛이었다.

“호진아 너 이거 처음 먹어 보지, 이게 생일 케이크인데 겉은 초콜렛이고 속은 카스텔라야, 우리아버지가 내 생일이라고 대구에서 사온 거다, 너의 집에서는 생일날 뭐해 주니?”

“아무것도 안 해준다, 그냥 뜨신 쌀밥에 생계란 하나만 넣어 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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