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50년 6월'> 5.연적에게 포로가 되다(3)
<소설 '1950년 6월'> 5.연적에게 포로가 되다(3)
  • 대구신문
  • 승인 2009.08.1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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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가하게 이미 떠나버린 최중위 문제따위로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영천 향교에서 나이가스무 살도 더 돼 보이는 다른 세 사람과 함께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관례를 치른 후`냉천(冷泉)’이라는 자를 받았다.

한여름의 차가운 샘물처럼 만백성의 갈증을풀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깊은 뜻이 있다는 설명을 몇 번이나 들으면서 그 추운 겨울에 아버지와 같이 조상님들의 산소를 일일이 참배하고원행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에게는 소고기국을 끓이고, 어물도가에 부탁해서 이곳 사람들이 즐겨먹는 문어와 물오징어,개상어 회를 특별히 주문 하는 등 부잣집 회갑잔치 못지않은 큰 대접을 했으며 이웃에서는메밀묵과 단술 등을 해오기도 했다.

이날은 우리선생님은물론 교장선생님, 면장님에다가 영순이 아버지까지 다녀 갔으며 대장을 비롯하여 우리군사들도 모처럼 실컷 먹었다.

특히 영순이 어머니는 소식을 듣고 많은 고기와 능금을 보내주었고 엄마도 데릴사위 문제는 이제 다 물 건너 간 이야기라며 고맙게받아들였다.

대충 이웃과 집안에 인사치레가 끝난 어느장날 해거름에우리 군사들끼리 대장 집에서나를 위한 송별회가 있다고 전갈이 왔다.

내가 미국 갈 때 입으려고 마련해둔 모직물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맨 뒤 미제 담요 오바를 입고 하이칼라로 기른 머리 위에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 대장이나 썼음직한 털모자를쓰고나서자 누나가,“니 이 시간에 기생 오라비 같이 해가 어데가노?”하고물었다.

“누부야는 관례까지 올린 어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고?” “애꼽어(역겨워) 죽겠네, 관례만 올리면 다 어른인가?” “당연하지, 여자고 남자고 시집장가 못 가면 백 살을 묵어도 다 애들인데 어른에게는 존댓말을 써야지.” 라고 하니 저녁밥을 짓다 말고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휑하니 집을 나와 버렸다.

대장 집에 도착하니 벌써 어둡살이 끼었고일당 다섯 명이 다 모여 있었으며 커다란 두리(둥근)상 한가운데 영덕대게 한 마리가 턱 버티고 앉아있었고 찐빵과 과자, 사이다, 구운 양미리, 무김치 등이 차려져 있었으며 막걸리 주전자와 놋 술잔도 놓여 있었고 대장의 누나가분 냄새를 풍기며 능금을 깎고 있다가 얼른 일어나 내 모자와 오바를 받아 걸었다.

친구들이 나의 기른 머리와 양복차림을 보고는`햐~’ 하는 감탄사와 함께 무척이나 부럽고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며 나 역시 친구들과의 차별화에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장의 집은 큰방 하나를 쪼개어 삼십 촉 백열등을 가운데달아놓은 쪽 방 두 개와 정지(부엌) 하나가 전부였으며 아 직도 우리말이서툰 호열댁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이 또 일장 연설을 했다.

“애~ 또 오늘은 우리의 친구 호진이가 얼마전에 영천향교에서 관례를 올리고 곧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우리 죽마고우들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모아서 차린 소찬이지만 맛있게 묵고 먼 길 무사히다녀오기 바란다, 이렇게 좋은 날 오늘은 술도한잔 하자.”고 하니 모두 박수를 쳤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대장이 한마디 했다.

“니도 답사 한마디 해라.”나는 대장의 연설솜씨가 무척 늘었다고 생각했고 혹시 내가 대장보다 못
할까 바 걱정을하며,“우리가 용채(용돈)래야 추석이나 설날에 삐가리 눈물만큼 받는 것이 전부인데 이렇게 거창한 송별회를 베풀어 주니 정말 고맙다, 그리고 내가`냉천’이라는 자를 받았으니 앞으로 사석에서는 내 이름을`호진’이 대신에`냉천’이라고 불러주기바란다, 내가 미국에 가더라도 우리군사들 즉우리의 대장 김상도를 위시하여 이문부, 김삼득, 김대옥, 강석수 이 다섯 친구들을 결코 잊지 않고 편지도 자주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금의환향 하겠으니 평생토록 우리들의 우정을변치 말자.”하고는 미국식으로 일일이 악수를하고 포옹을 했으며 대장의 누나와 포옹을 할때는 진
한 여자 냄새가 났다.

우리는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몇 순배를돌리고 지난날 피난민 아이들과 패싸움 했던것 하며 참외, 감자서리 이야기들을 신명 나게 늘어 놓다가 한창 유행하던 군가와 피난살이의 애환이 담긴 노래들을 불렀다.

특히 대장의 누나는 구찌베니(입술연지)를바르고 손님방에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역시 솜씨가 우리 보다는한 수 위였으며`목포의 눈물’, `해조곡’ 등 이난영의 노래를멋 떨어지게 불렀고 대장도 남인수의`낙화유수’나 `가거라 삼팔선’을 구성지게 불렀다.

그러나 나머지 우리들은 기껏해야`양양한앞길을 바라 볼 때에’나`친구 내 친구 어이이별해’하며 귀에 못이 박힌 군가나 학교에서배운 노래들을 부르며 상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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