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도 눈치”“접대서 해방”…변화하는 한국사회
“식사도 눈치”“접대서 해방”…변화하는 한국사회
  • 정민지
  • 승인 2016.10.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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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시행 일주일

공무원들, 란파라치 우려에

외부서 공무원증 착용 기피

결혼·장례식장 화환 감소

주례 약속 정치인 줄줄이 취소

퇴근 후 늘어난 개인시간

외국어 등 자기계발 투자도
김영란법이 짧은 시간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각종 의례·관습의 관행이 바뀌고 있다. 직업에 따라서 두려움·아쉬움이 커지기도 하고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어이없음을 겪기도 한다.

‘란파라치’(김영란법 위반 행위를 찾아 보상·포상금을 노리는 파파라치)들이 활개칠 것이라는 우려에 따라 공직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화환으로 가득찼던 결혼·장례식장은 겉치레를 걷어내고 있다.

매년 열리던 저소득층 김장나눔행사가 후원금 모금의 어려움으로 취소된 지역도 있고 주례를 서기로 했던 정치인이 돌연 거절해 졸지에 주례없는 결혼식을 하게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으로 수년간 미뤘던 운동을 다시 시작한 홍보담당자, 어학 공부로 자기계발에 나선 대기업 하청업체 직원 등은 수혜자다. 반면 후원이 제대로 안될까 걱정 중인 NGO 대표, 법 시행 직격탄을 맞은 화훼업체 등은 또다른 의미의 피해자(?)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는 좋다·나쁘다로 단순히 나눌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맞고 있다.

◇“페이스북 프로필도 수정해야 할 듯”

지난달 29일 점심시간, 대구 모 구청 인근 직원들이 자주 찾는 한 식당에는 공무원으로 보이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국밥 전문이라 비오는 날이면 점심시간 전에도 북적이던 식당이었다. 12시를 조금 넘기자 공무원 2~3명이 함께 식사를 하러 왔다. 하지만 행색 어디에서도 공무원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있어 일반인들과 차이가 났지만 이날은 아무도 공무원증을 하고 있지 않았다.

김 모씨는 “란파라치들에게 신분을 드러낼까봐 밖에서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페이스북이나 카톡 프로필에 구청 이름을 없애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주례없이 결혼하게 생겼다”

다음달 초 결혼 예정이던 이 모 씨는 최근 주례를 맡기로 했던 모 정치인이 “주례를 못 설 것 같다”며 거절의사를 밝혀 난처하게 됐다. 아버지 지인인 이 정치인은 ‘김영란법’을 이유로 들었다. 이씨와 예비 신부 모두 자영업자로 김영란법 적용대상자가 아니지만 혹시나 모른다는 것. 괜히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 나섰다가 찍힐까봐 몸을 사린 셈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돌발 상황으로 김영란법 유탄을 맞은 이씨는 “졸지에 주례 없이 결혼을 하게 될 것 같다”며 “축의금도 확 줄어들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당분간 후원 힘들것 같다”

매년 동 주민센터와 함께 저소득층 김장행사를 진행했던 NGO 대표 심미진 씨는 지난달 30일 올해 김장행사는 취소됐다는 말을 들었다. 마을축제와 겹친 탓이려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김영란법 때문인 것 같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실제 다른 지역에서도 동네 행사 관련해 공무원이 나서서 후원을 요구하기도 어렵고 주민들 역시 5~10만원씩 지역 발전 차원에서 냈던 ‘찬조’를 피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심 씨는 “혹시 문제 생길까봐 후원 지갑을 닫고 있는 듯 하다”며 “학교·공공기관 등에서도 겨울철 저소득층 후원 관련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허례허식 없어져 좋다”

대구지역 결혼식장 풍경도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1일 모 예식장 앞에 줄을 이뤘던 대형화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상과 다른 풍경에 결혼식 하객들은 혼주의 표정을 살피며 수근댔지만 신랑·신부가 공무원임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란법 대상자인 공직자에 논란 없이 줄 수 있는 경조사비는 축의금 및 조의금, 화환 등을 포함한 10만원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이날 결혼식 하객이었던 한 공무원은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축의금 10만원만 내려니 머쓱했지만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며 “당장에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한 것이겠지만 멀리 보면 관행적이던 경조사 문화에 부담이 줄어들 것 같다”고 말했다.

◇“헬스, 시작한다”

회식·접대 자리가 줄고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저녁 시간이 늘어나면서 운동이나 어학 및 자격증 공부 등을 계획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공무원 박모(34)씨는 평소 운동을 좋아하지만 일주일에 3일 이상 있는 술자리 때문에 회원제 헬스장 등록은 꿈도 못꿨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후 “업무는 되도록 일과시간 내에 해결하고 저녁 약속은 당분간 자제하라”는 지침이 내려오면서 퇴근 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 박 씨는 집 근처에 있는 무에타이 학원의 ‘직장인 전용 8시 강좌’에 등록하고 피트니스클럽 3개월 회원권도 끊었다. 박 씨는 “직장 생활 3년 동안 거의 매일 있었던 술자리 때문에 뱃살만 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다이어트 한번 하려고 한다”며 “같은 시간에 운동하는 사람들과 친목 모임도 만들게 돼서 새로운 인맥도 생겼다”고 말했다.

◇“퇴근 후 하고싶은 공부할 시간 생겼다”

엄도현(41)씨는 주말 저녁에도 접대 모임에 불려나가 날을 꼬박 새는 일이 허다했다. 건설 업체에서 일하는 엄 씨는 원활한 업무를 위해 관련 업체, 공공기관 건설과 직원 등이 함께 어울리는 골프, 조기축구 모임이나 테니스 모임에 참가해야 했다. 엄 씨는 그야말로 ‘연중무휴’였지만 김영란법 시행 후 10월 한 달간 잡혀 있던 모든 약속이 취소됐다. 평소 여행과 중화권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엄 씨는 중국어 회화 강좌에 등록했다. 엄 씨는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된 게 몇년 만인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민지·강나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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