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지나간 자리에 들려오는 소리들
붓 지나간 자리에 들려오는 소리들
  • 황인옥
  • 승인 2016.12.0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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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권기철 개인전
11일까지 수성아트피아
음악·문학 작품서 영감
서예하던 아버지 영향 받아
한자·한글 등 문자로 시각화
“그림, 불화에 대응하는 방식”
어이쿠-종이위에펜2015
권기철 작 ‘어이쿠’
화가 권기철의 첫 기억에는 글씨 쓰고 그림 그리며 노는 유년기가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5살 무렵이었다. 서예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그림도 그렸다. 궁핍한 살림에 연필이나 붓으로 끄적거리거나 크레파스가 고작이었지만 쓰고 그리는 것이 마냥 좋았다.

유년의 권기철은 현실의 궁핍도 남루함도 없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자신의 손끝으로 그려내는 세상에 매료됐다. 그리고 행복했다. 단 한 번의 갈등 없이 평생 그림에 매진할 수 있는 원천을 첫 기억이 자라는 유년기에 찾았으니 그는 행운아였다.

“어린시절 고갯마루 너머 주막 점방에 아버지 술심부름을 다니면서 들었던 바람소리, 꽃향기가 코끝에 남아있어요. 그때의 환영(幻影)이 지금 제 그림 속을 떠다니고 있어요.”

그의 십대는 남루했다. 9남매 중 여섯째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가 올 무렵 ‘나 하나쯤 사라진들 별 대수겠나’는 객기로 가출을 감행했다. 가출 후 신문보급소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돈벌이와 공부를 계속하며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았다. 비록 남루했지만 외롭거나 지치지 않았다. ‘쓰고 그리는 행복한 일’이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그림에 풍미를 더하는 음악과 문학과 만나는 시기여서 의미가 컸다.

“이른 새벽 옥탑방에서 일어나 신문보급소로 향하면서 실체 없는 결핍이 올라오곤 했어요. 그때 음악과 문학과 그림은 결핍을 채워주는 풍요의 원천이었어요. 이 시기 라디오와 책을 끼고 살았어요. 클래식 음악은 한 참 뒤인 대학시절에 만났죠.”

권기철의 회화는 그림과 음악과 문학의 합주이자 변주다. 그의 몸을 통과한 음악은 붓끝에서 시각적 리듬으로 치환하고, 가슴에서 필터링 된 문학은 그림의 골격이 됐다.

“음악과 문학은 그림을 그리기 전 예열 과정에 해당되죠. 음악을 듣고 책을 보면서 영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빠져 나가면서 무아의 상태가 됩니다. 그때 붓을 잡고 응집된 영감을 즉발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화폭에 펼쳐놓아요.”

시인 김선굉이 권기철의 작품을 보고 그의 몸에 현(弦)을 걸고 싶다고 할 만큼 권기철의 그림은 음악적이다. 때로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의 악기를 화폭에 직접적으로 옮기며 음악을 시각적으로 펼쳐 놓기도 하지만 대개 추상적인 형태와 색채로 은유된다. 이때 한자와 한글과 영문 등의 문자는 은유의 기제로 작동한다.

“비조형적인 음악을 조형성으로 치환하려면 추상성이 전제될 수밖에 없어요. 이 추상성의 모티브가 제게는 문자에요. 문자를 차용한 것은 서예를 한 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권기철이 음악을 시각적 추상성으로 치환하는 뼈대는 문자다. 특히 한 일(一)자가 기초가 된다. 그에게 ‘一’자는 좀 더 성숙해서 변화의 단계로 진화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이자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이 결핍은 그의 화두인 불화와 연결된다.

“제 그림은 하나의 형상 속에 다른 많은 형상이 포함돼 있고, 복잡한 형상일지라도 하나의 형상으로 돌아간다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을 지향점으로 합니다. 제게 ‘一’자는 전체가 단편일 수 있고, 단편이 전체일 수 있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구체적 표현인 셈이죠.”

권기철의 친구 장정일은 소설 ‘보트하우스’에서 ‘시인이 시를 쓰고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는 피아니스가 피아노를 치고 화가가 붓질하는 것은 마음의 어딘가가 불행하고 불만에 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기철에게도 삶은 불화(不和)였다. 권기철에게 그림은 세상의 불화와 자신의 불화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성장하면서 행복 속에는 일상적인 불행과 역겨움, 부정의 등의 행복과 반대되는 수많은 불화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게 됐어요. 만약 불화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있을까요? 제 미술은 행복 속에서 맞닥뜨리는 삶의 불화에 대응하는 방식이었어요.” 전시는 수성아트피아에서 11일까지. 053-668-1580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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