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 그리려 11년 매달려…은은한 깊이 더한 그림
빗줄기 그리려 11년 매달려…은은한 깊이 더한 그림
  • 정혜윤
  • 승인 2016.12.13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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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정치환 교수 추모 개인전 기획한 양향옥 화가
권태 이기려 시작한 미술
‘멘토’ 정치환 사사 꿈꾸며
칠전팔기 입시생활 극복
한지에 색 올리고 물뿌려
탈색 반복한 ‘한국적 美’
“영성 담은 스승님 흠모…
기법 자체가 존경의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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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옥의 전시 ‘오픈스튜디오’가 17일 오후 5시에 열린다.

칠전팔기는 저리가라였다. 미술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자그마치 11년이 걸렸다. 작가 양향옥이 28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미에 대한 영성,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영성을 가지신 예술가 현송 정치환 교수님을 흠모했어요. 그래서 반드시 교수님의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영남대학을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죠. 결국 11년 동안 9번의 도전에도 실패하고 대구가톨릭대학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진학하고 대학원을 영남대로 가면서 정 교수님의 제자가 됐어요.”

양향옥이 특별한 전시를 연다. 1년 전 타계한 스승 정치환 교수를 추억하는 전시를 기획한 것. 정 교수는 한국화단의 2세대 작가로서 평생을 오직 한길 수묵의 세계를 관통하며 한국화의 정체성 확립과 현대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사실 이번 전시는 처음에는 제 작업실에서 전시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기획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준비를 하면서 정치환 교수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교수님이 저의 작업실을 보시면 너무 좋아하셨을 텐데 못 보시고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 정 교수님을 추억하는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교수는 양향옥이 11년간이나 미술대학 입시에 매달리게 한 원동력이자 한지를 겹쳐 올리는 반복 작업을 통해 공간감과 정신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지금의 기법을 제시한 장본인이다. 그녀를 화가의 길로 이끌고, 작가로서의 방향성을 제시한 예술적 멘토였던 것.

“대학원에서 정 교수님 제자로 그림을 배우던 시기에 교수님께서 제 그림을 보시고 ‘색 사용에 있어 색이 너무 적나라하다. 우리 한국의 색을 쓰라’고 지적하시면서 한국의 색에 대해서 조언해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의 색이 어떤거죠?’ 라고 질문을 드렸더니 교수님께서 ‘달빛이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색’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양향옥이 오랜 연구와 고민 끝에 한국의 색을 담아내기 위한 기법으로 채택한 재료가 한지였다. 그녀는 한지를 뜯어 화폭에 붙이고 색을 올리고, 다시 물을 뿌려 탈색하고 말리는 과정을 10번 이상 반복한다.

한지에 색을 올리고 물로 씻어내는 반복된 과정 속에서 우연적으로 올라오는 색은 ‘오묘’하다. 때로는 꽃의 형상으로, 때로는 우주의 빅뱅과도 같은 형상 위에 오묘한 색감으로 현현(顯現)한다.

“색을 올리고 씻어내는 반복된 과정은 수행 과정과 동일해요. 나를 비워내고 드러내는 시간이자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죠. 존재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서 만난 것이 생명의 모태인 여성성과 모성애였어요. 정치환 교수님이 찾으라고 했던 한국적인 것, 그러면서 인류 보편의 본질과도 연결되는 것이 제게는 모성애였어요.” 양향옥이 작품 속에 스며있는 정신적 뿌리로 ‘여성성과 모성애’를 언급했다.

한지에 색을 올리고 물로 씻어내며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반복하며 비의도적으로 건진 색은 ‘오묘함’이다. 때로는 은은하게, 어떤 때는 강렬한 에너지로 오묘한 색감이 캔버스를 휘감는다. 정 교수가 언급했던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색’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색은 그윽하면서도 은은하고, 침묵이면서 아우성이었다. 그녀는 이 색을 “어머니의 색이자 치유의 색”이라고 언급했다.

“고요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감춰진 드라마틱한 시간들이 수없이 겹쳐있어요. 어쩌면 제가 처절하게 피 흘린 시간들이죠. 산고의 시간을 겪은 어머니와도 같은 시간들이었어요. 모든 것을 감내하고 포용하는 어머니 품속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까지 기댈 수 있는 아늑한 곳이 아닐런지요?”

양향옥의 삶은 그림 이전과 이후로 극명하게 갈린다. 결혼 이전의 그녀의 삶은 설레임의 연속이었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이 신비였고 감동이었다. 늘상 만나는 사람과 공간에도 반가움이 넘쳤고, 얼굴에는 행복한 기운이 넘쳤다. 결혼 후 얼마동안도 그런 기운은 계속됐다.

변화는 결혼 몇 년 후에 찾아왔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숨막힐 듯한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것.

“첫 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어요. 제 삶이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이것 말고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던 시기였죠. 그러던 어느 날 창밖에 비오는 풍경을 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이 빗줄기를 그리고 싶다’ 는 욕망이 올라왔어요.”

20대 후반의 가정주부가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면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미술 강좌 등의 취미 활동을 위한 과정을 찾기가 쉽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미술대학에 진학해 제대로 그림을 배워보겠다는 원을 세운 것. 그러면서 현송 정치환 교수를 알게 됐고, 그의 제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미술 실기를 가르치는 입시학원에 문을 두드렸다.

대학에 진학해 정치환 교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일념은 강했지만, 입시생 양향옥의 행보는 정석을 비껴갔다. 입시 실기에 맞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먹을 갈아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만 그려댔다. 10년 동안을 거의 매일 낙서만 했다. 그런 그녀가 미술대학에 합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작 그리고 싶었던 것은 빗줄기였는데 다른 것을 그리라고 하니 낙서만 했던 것 같아요.”

‘이건 아니다’라는 자각에 제대로 입시에 매달린 것은 입시 준비 10년 만이었다. 낙서를 중단하고 긴 머리를 싹뚝 자르고 대오각성하고 제대로 입시준비에 매달린 것. 비록 정 교수가 재직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마침내 대구 가톨릭대학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합격했다.

피를 토하는 고통의 시간 후에 찾아온 그림과의 인연. 그녀에게 그림은 생명 그 자체였다. 특히 한지와 색의 겹침으로 태어난 지금의 작업은 그녀 자신이자 “이것이야말로 한류다” 라며 좋아해준 정 교수에 대한 존경의 표식이다.

“한지를 붙이고 색을 올리면서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반복하는 과정에 내 생각도 씻기고 말리며 더 높은 곳을 향하게 되지요. 어느 순간이 되면 작업을 하는 나 자신마저 없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치유의 힘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정 교수님이 저를 치유하신 바로 그런 힘이라고 할까요?”

이번 전시는 스승을 추억하는 의미 외에도 전시장소를 갤러리가 아닌 작가의 작업실에서 진행하는 점이 특별하다. 그녀의 작업실은 경북 경산 남천강 앞에 위치해 있다. 경산시민들의 휴식처인 남천강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함께 갤러리 못지않은 넓은 공간과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흰 벽면, 그리고 작가의 정서가 묻어나는 카페 같은 분위기 등은 작업실 전시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장소를 물색하다가 문득 내 작업실도 갤러리 못지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작업실에서 전시하면 작가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어 더욱 진정성 있는 소통력도 높아질 것이라는 결론을 얻고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대형작품 30여점과 10호 미만 작품 30여점 등 총 60여점이 작업실 공간을 가득 메운다. 작품의 규모도 자유롭지만 작품 가격 또한 정하지 않았다. 구입하는 사람이 정하면 그것이 가격이 된다. 이러한 기획의 이면에는 ‘대중 속으로 다가가는 미술’이라는 그녀의 가치가 녹아있다.

“얼마 전 제소자들이 기거하는 구치소에 명상의 방 하나를 꾸몄어요. 그때 대중이 그림을 보러 오라고 하기 전에 화가가 먼저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특히 일반인들이 그림을 쉽게 소장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 작업실에 걸어서 관람객들을 기다리려고 해요.”

이번 전시는 전시와 파티를 겸한다. 이름하여 ‘작품 전시 및 수상한 파티를 겸한 오픈스튜디오’다. 17일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이날 작품전 및 수상한 파티에는 TBC 문채희 아나운서가 진행을 하고, 테너 현동헌· 바리톤 최득규· 소프라노 소은경·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멤버 팝피아니스트 이권희 뮤지션 등이 화려한 연주를 펼친다.

또 가장 추운 날 가장 따뜻한 음악과 따뜻한 그림으로 아름다운 시간을 갖고자 다과를 겸하는 이날 파티에는 양향옥이 그동안 열었던 열 네 번의 전시도 소개하며 작가를 이해하는 시간으로 꾸민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지인들을 초대해서 함께 제 그림을 감상하고 화가 양향옥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해 보았어요. 음악이 곁들여져 종합예술마당이 될 겁니다. 화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보다 친밀감 있게 공감하도록 하는데 취지를 둔만큼 의미 있고 재미있는 파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010-7363-7178.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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