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나무 그대로 살렸다”…나무따라 걸어온 40년 목공
“정직한 나무 그대로 살렸다”…나무따라 걸어온 40년 목공
  • 황인옥
  • 승인 2017.04.22 18: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일까지 갤러리제이원 차정보展
20대, 스승 없이 3년간 기술 마스터
첫 전시품에 ‘명품’ 소리 들을 정도
30대, 입산해 서예·詩作·그림까지
40대, 문화재 복원하며 내면 확장
차정보by전영호 (3)
하고 싶은 작품을 하며 살기로 작정하고 첫 번째 개인전을 연 차정보의 전시는 28일까지 갤러리제이원에서 열리고 있다. 전영호기자

25살에 ‘나답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꼬박 3개월을 고민한 끝에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정직하게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부터 뚝딱하면 무엇이 나오곤 하던 손재주를 떠올렸다. 가장 만만하면서도 진솔한 재료가 ‘나무’였다. 차정보의 목공예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나무는 인공적으로 찍어낼 수도 없고, 대충 만들어서 다 됐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다. 나무는 정직한 재료다. 그런 ‘나무’라면 내 꼴대로 살게 해 줄 것만 같았다.”

목공예 기술을 배운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 배운다는 것이 타고난 기질과 맞지 않았고, 법에 맞춰진 공정을 기술적으로 답습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남의 꽁무니를 뒤따르는 것은 체질적으로 거부했다.

걸림 없는 삶을 지향하는 삶에는 도전정신이 필수다. 도전정신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가 아닌가. 일단 무조건 깎고 봤다. 깎으면서 나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캐고, 자르고, 대패질하는 모든 과정을 손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기능이 쌓였고, 하다 보니 차정보(58) 풍의 목공예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얼 만들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먹는 것과 관견된 것, 쓰기 좋은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차와 관련된 것을 해보자 해서 차(茶) 목공예로 한정지었다. 차정보 만의 차탁, 차상, 과반들이 줄지어 내 손에서 나왔다.”

첫 개인전은 나무를 깎은지 3년 지나고 열었다. 반응은 좋았다. 시중에 판매되는 상품보다 가격이 10배나 비쌌지만 완판을 기록했다. 차인이 아니어도, 시중가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에도 차정보의 차(茶) 목공예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기본에 충실할 뿐 비결은 없었다. 그저 좋은 나무를 쓰고, 가장 쓰기 좋은 물건을 정성을 들여서 명품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세상이 명품으로 인정해 주었다.”

개인전은 24년 동안 8번을 열었다. 작품을 판매해서 풍족하지는 않아도 가정을 꾸리고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전공 한 것도, 유명한 스승에게 사사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뜬하게 전업 작가로 살아졌다.

개인전은 3년 주기로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놀고 먹을 수 있는’의 임계점이었다. 그가 “전시가 끝나고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고 나면 그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놀기만 했다”며 “1년 6개월쯤 놀면 바닥이 보인다. 그때 다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했다”며 놀고도 작가로 살아졌던 꿈같은 이야기를 무심하게도 했다.

상고 끝에 목공예로 길을 정하고, 스스로 개척해서 목공예로 먹고 살았다. 치열하게 살지 않았지만 유유자적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막힘없이 흘러갔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유유자적한 시간들은 태풍이 지난 후의 평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이미 죽음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26살에 죽음을 생각하고, 죽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 헤매 다녔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가정도 꾸렸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삶이 무의미하고 사는 것이 속절없이 느껴졌다. 10년 동안 죽을 장소를 찾아서 전국의 명산대천을 훑었다. 살고 싶은 욕망은 내려놓았지만, 좋은 곳에서 죽고 싶은 욕심은 의외로 강해서 쉽게 죽을 수도 없었다.

죽음을 위한 첫 여행은 첫 개인전이 끝난 직후였다. 10만원을 들고 무조건 설악산을 올랐다. 때마침 ‘입산금지’ 시기여서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불현듯 무서움이 엄습했다. 죽으러 간 자가 살겠다고 온 힘을 다해 산을 내려왔다. 첫 ‘죽기 시도’는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얼마 후 다시 설악산 대성폭포에 올랐다. 이번에는 소주를 잔뜩 사갔다. 취기가 오르면 호기롭게 폭포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한데 이번에는 술이 문제였다.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

일보후퇴하고 다음날 폭포에 다시 올랐다. 하지만 또 실패였다. 경치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술이나 경치나 취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경치는 그에게 ‘살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나하고 세상이 맞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런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싫었다. 어차피 한번은 죽는 인생인데, 조금 더 빨리 간다고 억울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기 위해 돌아다녔다.”

관심-소나무철2016-2
차정보 작 ‘관심(觀心)’

그렇게 10년을 꼬박 죽으러 다니다 결국 36살에 살아보기로 마음을 바꿔먹고 경남 창녕의 화왕산 자락 옥천계곡에 작업실을 짓고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헤매다 깨달음을 얻고 옥천계곡에 터를 잡았다. 이후 예술세계에도 변화가 왔다. 시 같은 글을 짓고,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옥천계곡 작업실에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나무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고, 외로움이 차오르면 나무를 파는 대신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달밤에 술 생각나서 편지를 보낸다고 하면 술이 한 박스가 왔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정성껏 쓰자는 생각이 들어 붓으로 썼다. 서예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했던 터라 생소하지 않았다. 하다 보니 그림도 나왔다.”

15년 동안 옥천계곡에 살면서 도인이 되어갈 무렵인 2004년, 46살에 또 다른 일이 찾아왔다. 지인의 추천이 있었다. 이번에는 문화재 복원이었다. 이 또한 ‘나무’였다. 어차피 나무를 다루는 일이니 익숙했다. 타고난 방랑벽이 있었는지라 오히려 구미가 당겼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산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느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방랑벽도 해소할 수 있다. 일석 이조도 모자라 일석 삼조가 아닌가? 목수일도 그렇게 물 흐르듯 어우러졌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모양새가 저절로 갖춰졌다.

“문화재복원은 목수와 탱화를 그리는 사람, 기와지붕 기술자, 미장 기술자들이 모여야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게로 모여들었다.”

문화재 복원 일도 10여년을 했다. 이제는 꼭 품을 보태야 하는 일만 하고 한 켠으로 물러나 있다. 60살이 가까워오자 더 늦기 전에 진정으로 하고 싶을 일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올라와서 보폭조절을 했다. ‘빵’이 아닌 진짜 ‘작품’이 시작됐다.

작품은 40여년의 삶이 응축될 형태로 나왔다. 나무를 파고, 글을 짓고, 글씨를 쓰고, 쇠를 다듬던 일들을 작품 속에서 하나로 엮어냈다. 그 첫 전시가 30일까지 갤러리제이원에서 열린다. 통산 9번째 전시이자 목공예가 아닌 차정보의 진짜 끼와 재능을 만날 수 있는 첫 전시다. 전시에는 서예와 그림과 나무와 철을 혼용한 작품 30여점을 걸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 나이가 됐다. 깎아보고 싶은 것은 너무 많다. 빵에 대한 강박관념을 내려놓으니 작품이 순수해졌다. 요즘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다.”

작품은 즉문즉답처럼 나온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오래된 나무나 공예품을 만나면 일단 수집부터 하고 본다. 작업실에서 그 재료들을 모아놓고 뚫어지게 바라보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즉답처럼 형태가 나온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영감들을 그저 풀어놓으면 작품이 된다.

죽으러 간 자리에서 ‘눈뜨고 좋고 눈 감아도 좋다. 오늘 죽어도 호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불필요한 욕망과 고민이 없어졌다. 하루하루 눈뜨면 즐거웠다. 일도 작품도 그렇게 했다. 이번 작품들도 욕심을 버리고 물 흐르듯 흘러간 결과다.

“즐거워서 작품을 하고, 즐겁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즐거웠기 때문에 살았다. 나무의 생김 대로 깎아서 작품을 만들 듯이 내 인생도 생긴대로 살다 가고 싶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053-252-0614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바람부는날3
차정보 작 ‘바람부는 날’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