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같은 등산로… 골골마다 서린 역사 스토리…
산책길 같은 등산로… 골골마다 서린 역사 스토리…
  • 황인옥
  • 승인 2017.10.1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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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과 함께하는 대구의 걷기 <3> 앞산 둘레길
산성산~앞산~대덕산 줄기
접근 쉽고 야간 걷기도 가능
한 바퀴 총 22㎞ 8시간 소요
곳곳에 왕건·두사충 ‘흔적’
후백제군에 쫓긴 왕건, 앞산서 3개월 버텨
명나라 장수 두사충, 정유재란때 조선 귀화
6·25때 이주한 평안도민 ‘평안동산’ 건립
앞산1
앞산둘레길-자락길1
앞산 둘레길
3
앞산자락길 안내판(충혼탑, 큰골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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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비골 평안동산(달서구 달비골)

#걷기와 마라톤과 등산

걷기와 마라톤 중에서 어느 것이 건강에 더 좋을까? 이 문제에 대해 30여 년 전 미국에서 논쟁이 있었다.

걷기와 마라톤의 오랜 논쟁은 마라톤이 더 낫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마라톤 도중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함으로써 끝이 났다. 실제로 마라톤은 11만km마다 한 명이 사망한다는 통계수치가 있다.

걷기의 변형인 등산은 많은 장점이 있다. 산속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산행은 도심의 산책로를 걷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상쾌하고, 산행 중간 중간의 멋진 경치와 정상에서 맛보는 성취감은 도저히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하지만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많은 돈을 들여 장비를 준비해야 하고, 등산에 대한 기초지식을 알아야 한다.

왠만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과 어울려 가야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러나 등산의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다. 수십 년을 열심히 등산하여 백두대간을 종주했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은 모두 무릎이상으로 괴로워한다. 젊은 결기로 시작한 등산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등산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하산 방법이다. 내려올 때는 체중의 3배가 되는 하중이 무릎에 걸린다. 자신의 체중과 등산 가방 무게를 합한 무게의 3배는 엄청난 하중이다. 관절질환 예방법은 등산 시작 전에 충분한 준비운동과 스틱 사용이다. 스틱 사용은 체중을 분산시켜주기에 무릎이 보호되고, 등산 도중의 낙상이나 해충 퇴치 등 우발적인 사고 방지에도 도움을 준다.

#앞산둘레길(앞산자락길)

등산하면 관광버스를 타고 친구들과 어울려 멀리 떠나는 것만 생각하는데 도심에도 멋진 경치와 깊은 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둘레길과 종주길이 많다. 앞산 둘레길(자락길), 대구 둘레길, 9산 종주길, 비슬산 둘레길, 팔공산 종주길, 환성산 종주길, 용지봉 종주길, 형제봉 둘레길, 와룡산 종주길, 도덕산 종주길, 함지산 둘레길 등이 그것이다.

앞산 둘레길에 대해 살펴보자. 앞산은 대구 남구와 달서구에 걸쳐 동서로 이어진 산성산~앞산~대덕산 줄기를 말하는데 앞산(658.7m)이 제일 높기에 통상 앞산이라 부르고, 산 둘레에 만들어진 걷기길을 <앞산둘레길>이라 한다. 앞산은 도심에서 가까워 접근하기 쉽고, 안전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곳곳에 조명등이 설치되어 야간 걷기도 가능하고, 둘레길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는 경치도 멋진 곳이다.

앞산이나 그 둘레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고산골의 건열화석이나 공룡발자국,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에 얽힌 고려 태조 왕건 이야기, 큰골의 낙동강 승전기념관과 이시영 순국기념탑과 이호우 시비, 정유재란 때 귀화한 명나라 두사충의 대명단, 안지랑골 주변의 곱창골목과 앞산카페거리, 달비골의 평안동산, 달비고개에서 용두골로 넘어가는 길에 펼쳐지는 가창댐과 최정산을 조망하는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 주상절리, 용두토성, 메타세콰이어길 등 많은 이야기가 앞산둘레길 걷기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앞산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구간은 총 22km, 8시간 정도 걸린다. 앞산자락길은 고산골 입구에서 달비골의 달서구 청소년수련관까지 인데 총 15km, 6시간 정도 걸린다. 대구시 남구청은 앞산자락길 중에서 8km 정도의 남구 구간(고산골 입구~ 골안골 황룡사 입구)을 6개 구간으로 나누었다. 앞산둘레길, 앞산자락길, 남구청에서 관리하는 6개 구간 명칭이 헷갈리니 정리를 하자. 앞산 둘레를 하나의 원으로 보았을 때, 360도 돌아서 원점회귀하면 둘레길이고, 고산골에서 달서구 청소년수련관까지 180도 돌면 자락길, 고산골에서 골안골까지 90도 정도 돌면 남구청에서 관리하는 자락길이 된다.

앞산둘레길, 앞산자락길, 남구청 6개 구간, 전체의 경로와 거리, 명소는 그림과 같다.

#앞산둘레길(자락길)에 얽힌 이야기

앞산자락길에 있는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 뿐만 아니라 대구지역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국력이 쇠퇴하여 감당할 수 없던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견훤의 군대는 경애왕을 죽이고 경주를 노략질 한 후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빠르게 이동하여 팔공산 동쪽 환성산 근처에서 왕건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게 달려온 왕건의 군사는 견훤군의 매복에 걸려 팔공산 아래(지묘동 일대)에서 후백제군과 일대 격전을 치른다. 이 전투를 동수대전(桐藪大戰)이라 한다. 동수대전에서 왕건의 군사는 크게 패해 왕건 자신도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신숭겸 장군이 신묘한 꾀를 내어 왕건의 갑옷과 붉은 투구를 쓰고 활로를 만들었고, 왕건은 혼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신숭겸 장군과 김락 장군은 왕건을 대신해서 죽게 된다. 붉은 투구를 쓴 왕건을 잡았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던 후백제군으로부터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친 왕건은 사색이 되었지만 추격병이 없어서 안심(安心) 혹은 해안을 했고, 현재의 해안, 반야월(半夜月), 안심 지역을 지나 금호강을 건넜다(안심습지나 팔현습지 근처를 건넜을 것이다). 금호강을 건넌 왕건은 앞산(대덕산)으로 도망쳐 은적사 뒤편의 조그마한 바위굴에 몸을 숨긴다. 붉은 투구를 쓴 장수는 왕건이 아니라 신숭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백제군은 왕건을 잡기위해 앞산으로 추격을 한다. 왕건이 처음 숨었던 바위굴 앞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왕건이 몸을 숨기고 나서 거미가 내려와 거미줄을 쳤다. 천우신조였다. 거미줄이 많아 근처에 인적이 없다고 생각한 후백제군은 결국 왕건을 찾지 못하고 돌아간다. 후백제군이 수색하는 3일 동안 꼼짝없이 좁은 굴에서 숨어 지낸 왕건은 추격병이 물러가자 굴에서 나와 산등성이를 넘어 넓은 굴(왕굴-안일사 윗쪽 500m 지점)로 옮겨 3개월을 숨어 지낸다. 3개월 후, 왕건은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을 넘어 편안하게 쉬게 되고(임휴사), 구사일생한 왕건은 지원군과 함께 칠곡, 선산, 김천을 지나 북쪽으로 멀리 도망치게 된다. 동수대전의 전말이다.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이 죽은 곳에 지묘사(智妙寺)를, 앞산에 처음 몸을 숨겨 3일을 지낸 곳에 은적사(隱跡寺)를, 3개월을 숨어 지낸 왕굴이 있던 곳에 안일사(安逸寺)를, 지원군을 만나 휴식을 취한 곳에 임휴사(臨休寺)를 세운다. 그 외에도 불로동, 봉무동, 연경동, 지묘동, 왕산, 초례봉, 무태, 파군재, 시량리(失王里), 해안, 반야월, 안심, 고모(顧母), 살내, 장군수, 독좌암 등도 모두 왕건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두사충(杜師忠)은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 휘하의 수륙지획 주사(지형을 살펴 진지 구축을 담당하는 참모. 시성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은 풍수지리의 대가였다)로 참전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명나라군은 후에 충북 진천에서 진지 구축에 실패하여 왜군에게 대패하는데, 이여송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진지구축에 실패한 두사충을 처형하려고 한다. 충북 진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시발, 우의정 정탁 등의 탄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두사충은 정유재란에도 다시 참전하여 이순신 장군과 교분을 쌓기도 한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의 경상감영공원 근처에 정착한다. 그러나 임란 후 경상감영이 상주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두사충은 경상감영에서 뽕나무골(계산성당 뒤편)로 이사했다가 후에 다시 대덕산 기슭으로 옮겨 살았다. 두사충은 대덕산 기슭에 살면서 서쪽의 명나라 황제에게 배례하기 위해 대명단을 쌓았다. 현재 대명단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골안골 근처로 추정되고, 두사충이 살던 마을이나 대명단이 있던 마을은 대명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두사충은 죽어서 수성구 만촌 2동 남부정류장 뒤편 형제봉 기슭에 묻히고, 두릉 두씨 후손들은 이곳에 모명재를 세워 두사충을 추모하고 있다. 대구에 남은 두사충의 유적을 잘 관리하면 한중 교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950년 8월, 대구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마산, 창녕, 대구, 경주, 포항을 경계로 하는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북진하게 된다. 큰골의 낙동강 승전기념관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참전 용사의 얼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관은 유물전시관이나 추모관 같은 내부전시실과 전쟁에 사용된 각종 무기를 전시한 외부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뒤편에는 이시영 선생 순국기념탑이 있다. 이시영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한인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인재를 육성하였다. 시조시인 이호우는 여동생 이영도와 함께 오누이 시인이다.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서 출생한 이호우는 광복 후 대구로 이사하여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죽순>, <낙강> 등의 동인지에 시조를 발표하여 대구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승전기념관 뒤쪽 산속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시비에는 대표시조 개화(開花)가 새겨져 있다.

달비골 입구에서 2km정도 멋진 걷기길을 따라가면 평안동산이 있다. 정자와 샘터가 있어서 달서구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평안동산은 6.25 이후 대구에 이주한 평안도민의 사유지에 건립되었고, 실향민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달비골은 골이 깊고, 계곡에 비치는 달빛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달비가 한자로 바뀌면서 월배(月背)가 되었다. 평안동산에서 가창으로 넘어가는 달비고개까지는 1km 남짓이다. 달비고개에서 가창면 사무소까지는 3km가 넘고, 면사무소 근처에는 찐빵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가창교에서 고산골 입구의 용두토성까지는 신천 걷기길을 이용하거나 장암사, 법왕사 능선 길을 이용하여 출발지인 고산골로 돌아온다. 많은 갈림길이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나뭇잎이 곱게 물드는 가을과 눈이 쌓인 겨울은 등산의 계절이기도 하다. 도시 주변의 걷기길도 산자락을 돌아가며 조성된 길이 많다. 평지의 걷기길과는 달리 산을 끼고 만들어진 길을 걸을 때는 운동화 보다는 등산화가 낫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반드시 스틱을 사용하여 무릎을 보호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떠나는 등산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충분한 준비운동과 등산길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추고 앞산자락길(둘레길) 걷기를 떠나보자.

칼럼니스트 bluesunk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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