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백태호 화백, 실존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 만든 걸작 ‘명태’
[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백태호 화백, 실존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 만든 걸작 ‘명태’
  • 황인옥
  • 승인 2018.03.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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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동경미술학교 입학
일제치하·남북분단 겪으며
아픔에 집중하고 은둔 생활
1950~70년대 인물·정물화
70년대 후반 수족마비 앓고
황태 되는 과정 메타포 차용
불운했던 삶의 질곡 담아내
백태호작-명태
백태호 작 ‘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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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백태호 화백
바짝 마른 몸이 하늘로 비상한다. 박제된 몸은 입을 쩍 벌리고 맺힌 숨을 토해낸다. 침탈로 강점당한 몸이자 고난에 맞선 몸이다. 수직으로 상승하는 몸 밖에는 힘찬 기운이 붉다. 2017년 대구문화예술화관에서 본 故백태호 작가의 ‘명태’ 연작에 대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명태를 그려놓고 딸에게 물었다. “잘 들어봐라! 들리나?”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마른 몸에서 터져 나온 절규가 허공에 부딪히더니 위로 솟구쳐 오른다. 쓰린 속을 훑고 토한 비명 같다. 뭉크의 <절규>와는 결이 다른 한(恨)서린 몸부림이다. 작가는 평소 과묵했다. 노년에는 더더욱 깊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끔은 세상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신비한 미소를 짓기도 하였다. 딸에게는 늘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였다. 미남자는 아니었지만 고요한 성품은 한결같았다. 작가 백미혜는 故백태호 작가의 성정이 유(柔)했다 회상한다. 두 사람은 부녀지간이다. 고인이 된 화가의 예술관을 듣고자 백미혜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1923년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난 작가 故백태호는 한국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대 한 복판에서 청춘을 보낸 1.5세대 서양화가이다. 그는 일찍이 일본 관립미술학교에서 정통미술교육을 받은 화가였다. 계성중학교 미술반 반장이던 당시 동경미술학교 출신인 미술교사 서진달을 만난 것이 화가의 꿈을 굳히게 된 계기였다. 화가의 길을 조부가 반대했으나 그는 꿈을 접지 않고 1942년 일본으로 가 이듬해인 43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아사구라 후미호 교실에서 수학)한다. 예비학습과정을 마치고 본과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 1945년에 돌연 귀국한 것은 일본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화가로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귀국한 그 무렵부터이다. 1950년 1회 개인전(부산)과 틈을 둔 1983년 2회 개인전(대구 중앙미술관)에 이어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한 그는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대구화단의 중심에 서서 남관, 주경 등과 함께 대구미술협회를 창립하였다. 형인 백낙종을 포함한 박인채, 김우조, 이복동 등과 ‘향토작가 7인 전’도 연다. ‘향토작가 7인 전’은 6·25때 대구로 피난 온 서울화가들에 맞선 전시회였다. 당시만 해도 중앙과 대구지역 작가들은 구상과 비구상이라는 양분된 예술형식을 유지하였다. 故백태호 작가는 구상작가 그룹인 ‘향토회’ 창립멤버(1959년)였다. 그 외에는 어떤 그룹에도 몸담지 않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시대기류에 편승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삶으로 기울었다. 작고하기 직전까지 고유한 예술세계를 홀로 개척해나간 것이다. 그 후 1988년 <백태호 소리치는 명태전>을 구상하던 중 심장미비로 65년의 생을 마감한다. 작고한지 22년 후인 2010년에 철우 故백태호 특별회고 유작전(수성아트피아 기획)에서 재조명된바 있다.

시대는 작가를 낳고 작가는 시대를 기록한다. 미술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미술사는 인간사와 맥을 같이한다. 故백태호 작가가 살았던 20세기는 인간사와 미술사가 모두 격한 변화를 보인 시대이다. 신기함과 놀라움에 기대가 더해진 것은 1·2차 세계대전과 산업혁명이 주요 요인이다. 특히 전쟁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치와 패러다임에서 첨예한 차이와 변화를 가져왔다. 더불어 상당한 두려움을 동반했다.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는 실존에 대한 질문을 쉴 수 없다. 작품에는 자신과 이웃의 아픔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故백태호 작가의 작품이 그랬다. 그에게 예술은 척박한 세상의 탈출구이자 또 다른 발언의 장이었다. 허물어진 담장 아래 미제 깡통을 든 걸인을 그렸다는 이유로 억압받아야 했다. 붉은 색 취향조차 감시받던 암울한 사회 환경 속에서 예술가의 영혼은 감금당한 셈이다. 결국 표현의 자유를 제약받던 시대의 작가는 명상과 은둔생활을 택한다. 대구화단과도 거리를 두었다. 서양화가 1.5세대임에도 대구화단에서 故백태호 작가의 화업이 드물게 거론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예술의 본질이 삶에 대한 성찰이자 철학적 탐구라면 사색으로 드러난 일련의 갈구에는 상실이 창궐하던 시대의 절규와 소망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와 분단현실 가운데 다진 예술은 암울함이 솔직한 표현이다. 故백태호 작가의 화면에서 묻어나는 표현주의적인 미학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반면 본의 아니게 마주하게 된 참담한 현실이 자신만의 세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고 사색의 토양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유한 예술언어 구축에 원동력이 되었다고도 생각된다. 그 기운이 ‘명태’ 작업에서 뚜렷하다.

작가는 명태 외에도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1950년대에는 인물화를, 60년대에는 바다풍경과 낡은 배를 주로 그렸다. 부서진 사물에 집착한 것은 상처받은 삶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을까. 70년대에 그린 도자기류와 토우, 토기, 돌, 모과, 석류 등의 정물화는 표현법이 간명하다. 간명함이 이성적이면서도 명상적이다. 다소 19세기 말 근대회화에 물고를 튼 세잔의 통찰과도 상통한다. 소재가 주는 본래의 의미를 고수하는 환원주의적인 요소도 읽혀진다. 故백태호 작가에게 이런 정물화는 본질에 대한 탐구이자 재생과 부활의 의미였을 것이다.

1977년 고혈압으로 수족마비가 오기 전까지 작가는 자연주의식 표현방식을 고수했다. 수족마비가 온 후부터는 표현주의식 화풍으로 변모한다. 수천 장의 크로키는 마비된 손을 풀기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시기에 몰입한 ‘명태’시리즈는 삶과 죽음, 실존에 대한 메타포이다. 명태 연작에 단 ‘날아오르는’ ‘소리치는’ ‘솟구쳐 오르는’ ‘절규하는’ 이라는 제목이 이 같은 짐작을 뒷받침한다. 명태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생선이다. 황태로 거듭나기까지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하늘 향해 벌려놓은 입 속에는 맑은 공기와 추위가 고르게 들어차야 한다. 네댓 달 찬바람에 몸이 마르는 과정을 거쳐야지 비로소 온전한 황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녹록치 않은 과정을 거친 몸이다. 명태는 곧 불운했던 삶의 질곡 다름 아니다. 결국 명태는 마지막 혼의 불태움이자 재생과 부활의 알레고리이다. 고치 속에서 날개를 준비하던 나비처럼 故백태호 작가의 자발적 고립도 완전한 비상을 준비하는 웅크림이 아니었을까 한다.

예술의 힘은 장황한 형식이 아닌 알찬 내면으로부터 출발한다. 故백태호 작가의 핵심만을 남긴 마른 명태는 내면의 다짐 다름 아니다. 딸인 백미혜는 반추한다. 그런 ‘명태’를 그린 아버지가 누구보다 존경스럽다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인이 다져온 예술의 진정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유작들을 앞에 놓고 나는 꿈꾼다. 그동안 숨어있던 아버지의 마른 명태들이 세상 바깥으로 살아나와 일제히 빛처럼 함성처럼 솟구쳐 오르는 건강한 꿈을(‘내 아버지 철우 백태호 화백’, 백미혜 작가의 글 중에서)” 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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