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단색 아래 겹겹이 쌓아올린 자연주의 감성
소박한 단색 아래 겹겹이 쌓아올린 자연주의 감성
  • 정혜윤
  • 승인 2016.11.2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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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까지 리안갤러리 개인전 여는 화가 김태호

여행길서 찍은 풍경 바탕

기본 드로잉에 붓칠 더해

햇살·향기 등 심상 표현
/news/photo/first/201611/img_212188_1.jpg"김태호작가-칼라/news/photo/first/201611/img_212188_1.jpg"
김태호 화가가 리안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일견 단색화처럼 보이지만, 그는 “많은 풍경과, 풍경을 바라본 감성이 오롯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그림 앞에 섰을 뿐인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여행한 세상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 모험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왕이면 동화 같은 순수한 세상이라면 더 좋을 터. 거기에 마음의 쉼표 하나 찍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서양화가 김태호(65·서울여대 교수)의 작품이 딱 그랬다. 벽에 걸린 작품 앞에 서기만 해도 몸이 부드러워지고, 어딘가로 내달리고 싶어진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자연주의적인 감성으로 채워진 김태호가 초대하는 세상이다.

“절에서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글귀를 봤는데 울림이 컸어요. 저도 그런 풍경을 갈망했나 봅니다. 의도적으로 지워내서 단색인것 같은 제 작품 아래에는 풍경이 있어요. 이 숨겨놓은 세상을 사람들이 어렴풋이나마 발견하고 그 세상으로 사색해 들어왔으면 해요. 제 그림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었으면 좋겠어요.”

딱 보면 단색화다. 단색이 평면을 장악한다. 가끔은 절제된 식물이나 동물의 형태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견 없는 단색화다. 흡사 바탕색만 칠해놓고 끝낸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 그의 그림에는 엄연히 풍경이 존재한다. 단지 의도적인 지워냄이 더해졌을 뿐이다. 사실주의적 드로잉으로 시작해 여러 가지 색을 반복적으로 올리며 형태를 지워낸 것. 그러면서도 대상에서 느꼈던 감정은 오롯이 살려낸다. 이렇게 중첩된 색에서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웅성거린다.

“제 작품이 단색화라구요? 얼마나 많은 풍경들이 들어가는데요. 그리고 풍경을 바라본 제 감성도 오롯이 담기고요. 단색화라면 억울하죠.(웃음)”

김태호는 여행하면서 풍경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는 풍경은 시각적인 형상이라기보다 감정의 결을 흔든 심상의 풍경들이다. 셔터를 ‘찰칵’하고 누르는 순간에 카메라 속으로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소리와 햇살의 일렁임, 가뭄 끝에 내린 단비에 푸석이는 흙 내음, 유년기에 의식 깊숙이 각인된 그리운 감정이 그대로 뒤섞여 들어간다.

“여행에서 찍은 풍경들을 드로잉 밑작업으로 먼저 표현하죠. 그 위에 제가 들었던 바람소리를 들으며 떠올렸던 색을 입히고, 또 그 위에 햇살의 일렁임을 닮은 색을 더하죠. 또 그 위에 푸석이는 흙 내음과 풍경을 보고 제가 느꼈던 감정이 색의 형태로 올라가죠. 그런 다양한 감정들이 하나의 화폭 속에 색이라는 물성으로 한 겹 한 겹 쌓여 중첩되지요.”

김태호 그림의 지류는 두 줄기다. 형태미와 서정성이 그것이다. 그는 풍경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마음에서 포착된 서정성으로 풀어낸다. 단지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그는 풍경과 조우하면서 스쳤던 감정을 절제된 형태미로 드러낸다. 견고하게 끌고 가는 절제미는 형태미와 서정성을 하나로 발효되도록 이끄는 일종의 효모다.

“저는 미술의 형식을 무시하거나 소홀하게 취급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소통력을 높이기 위해 형식을 버린다면 소설을 쓰지 그림을 그릴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미술의 형식 안에서 충분히 소설 같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봐요. 대신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좀 더 깊어지겠죠. 제게는 그 ‘어떻게?’가 ‘절제미’인 것 같아요.”

강조했듯, 그에게 형태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는 서정성이다. 서정성은 그의 작품의 핵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라고 믿는다. 풍경으로 접하고 오감으로 느꼈던 감정의 편린이 그림에 그대로 담기는 것은 그의 이러한 철학의 귀결이다. 단지 절제된 형태미로 세련 되게 조절될 뿐이다.

왜 ‘그리움’이었을까? 왜 ‘서정’이었을까? 시간을 좀 길게 뒤로 돌려서 5~7살까지의 그의 유년기를 되돌려보자. 목가적인 삽화 하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느 날 부모의 손에 이끌려 유년의 김태호가 서울에서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고 충격이었다. 심한 야뇨증에 의한 일종의 유배였고 할머니 집은 그의 부모가 택한 유배지였다. 몇날 몇일을 눈물로 지새우던 유년의 김태호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살가운 사랑 속에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던 시골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한다.

“어느 날부턴가 그렇게 무서워하던 덩치가 산만한 소 곁에 누워 쏟아져 내리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놀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만난 자연은 지극한 순수였고, 평화였고, 그리움이었고, 위안이었죠. 물론 야뇨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죠.(웃음).”

80년대 후반에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입국한 김태호가 자신만의 조형성과 정서를 찾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때마침 어릴 적 놀았던 개울가 징검다리 앞에 서게 된다. 중간쯤에 다다르자 어린 시절 맡았던 바람 향기와 풀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됐다. 이거다 싶었다.

“유학 후에 앞으로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했죠. 화가라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통과의례였겠죠. 그때 저를 잡아끈 것이 어린 시절의 풍경이었죠. 그것은 그리움이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감정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면서 저 만의 정서와 색, 그리고 조형성을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극도로 절제된 색과 형태를 통해 서정을 그려내는 서양화가 김태호의 전시가 리안갤러리에서 12월 30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여러 전시에서 소개됐던 ‘모호함’을 주제로 신작을 포함한 23점을 걸었다. 평면 회화 위주로 소개하는 2층과 달리 1층에는 회화와 함께 벽면의 그림이 그대로 투영되는 효과를 주는 전시장 바닥 전체를 유리로 메운 독특한 설치작업도 선보이고 있다.

특히 1층 전시장에는 중첩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단색에 가까운 평면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품 제작 과정을 친절하게 전시장에 펼쳐놓는 것.

“저는 작품을 끝내기 바로 전까지의 단계를 드로잉이라고 생각해요. 완성작이 단색화에 가깝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색의 중첩이 들어갑니다. 1층 전시장은 그 과정 안에 화가가 무슨 이야기들을 심었는지 관람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어요.”

이번 전시의 주제는 ‘모호함’이다. 작품 또한 ‘모호함’ 연작들이 주를 이룬다. 간결하지만 형태가 남아있는 것은 형태를 모호하게 비틀고, 단색 속에 풍경을 품고 있는 형태가 없는 작품에도 다양한 색의 중첩을 통해 모호함을 살린다. 이 모호함은 사색의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모호함을 보완하는 기제는 역시 색이다. 그는 색을 “언어”라고 말한다.

“색 하나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색 하나로 소설 같은 이야기도 표현하고 형태미도 살려내고 화가의 감정까지도 드러내죠. 모호함이 사색으로 이끈다면 색은 화가가 심어놓은 세상과 관람객이 만드는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작업 초기였던 프랑스 유학 후의 작업은 표현주의적 드로잉 요소가 강한 작품이 주를 이뤘다. 무겁고 어두운 검은색과 적갈색의 컬러와 거친 붓질로 인물의 측면 상이나 석검, 나무로 된 물고기 등이 등장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최근 작품과 달리 편안한 이미지는 아니며 개인적인 의미는 불확실하거나 은폐적이다.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갈등의 반영이었다.

가벼워 흩어지기 쉬운 은분을 사용해 여러 번 채색하고 겹겹이 쌓아 올리거나 저절로 흘러내리며 아련함이 드러나는 시기는 91년경부터다. 중첩이 등장하고 작품의 색채가 밝아진 것.

김태호의 그림에는 폭력과 충격과 항변이 없다. 그림이 곧 그리움이자 동화다. 관람자는 그가 그린 동화 속으로 빠져 들면 될 일이다. 단색 너머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추억과 그리움과 철학과 종교가 수선거리기 때문이다. 김태호는 자신의 그림이 ‘위안처’이기를 바랬다.

“그림 앞에 서서 멍하게 바라보다가 궁금해지면 조금 더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면서 제가 그린 이야기를 찾기도 하고, 그러면서 관람자 스스로 상상을 가미해 보면서 느긋하게 소통했으면 좋겠어요. 마치 동화책을 읽듯이 말이죠. 아름다운 동화책을 보고 위로받고 순수함을 회복하듯이 제 그림 또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김태호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에서 석사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학고재, 리안갤러리, 갤러리 서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제19회 쌍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작가로 참가했다. 최근에 제14회 김종영미술상수상자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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