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저녁까지 아름다울 순 없을까? -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삶이 저녁까지 아름다울 순 없을까? -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 승인 2017.02.2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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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경 하브루타 도서관 관장
민여사는 뛰어난 살림꾼이셨는데 특히나 식물을 잘 키우셨다. 덕분에 민여사네 식구들은 사계절 내내 차례차례 식물들이 꽃을 피우는 걸 볼 수 있어 좋긴 했으나 화분들을 보살펴야 하는 귀찮음도 있었다. 추운 겨울에는 안으로 들어온 화분과 함께 북적북적 모여 지내야 했으니 “화분 좀 줄이면 안 돼?”라는 식구들의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민여사의 하루는 이른 새벽, 밥을 지으면서 화분에 물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흥얼흥얼 불경을 외우기도 하고, 애틋함을 담은 타령조로 꽃들에게 기특하고 예쁘고 대견하다는 아침인사를 건네는 사이 새벽에서 아침이 밝아온다. 동네에서는 그런 민여사를 꽃박사라 불렀다.

가끔 이웃의 화분이 병원처럼 민여사네집에 와 몇 달간 머무르다 다시 회복하여 돌아가기도 했다. 민여사가 이렇게 식물을 잘 키우는 이유는 아마도 살아있는 꽃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민여사가 떠오른 그림책이 있다.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보물창고). 이 책은 칼데콧 상과 뉴베리 상을 두 번씩 수상한 관록 있는 작가 신시아 라일런트의 작품인데 상실이 두려워 사랑을 시작하지 않으려는 할머니 로잰느가 어느 날 찾아온 강아지 한 마리를 통해서 상실 또한 사랑처럼 소중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로잰느는 외로운 게 싫다. 나이가 많은 탓에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날아오는 건 우편물밖에 없다. 이름을 부를 친구들이 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집, 의자, 자동차 등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에만 이름을 붙이고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강아지 한 마리가 매일 찾아온다. 할머니는 강아지 역시 먼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려 버틴다. 하지만 자취를 감춘 강아지를 유기견 보호소에서 찾아내고 ‘러키’라는 이름과 함께 집으로 데리고 돌아오게 된다.

상실의 아픔을 겪고 나면, 다시 만남이 두렵다. 그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러키와 함께 살게 된 로잰느가 이전보다 더 행복해 질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결말을 보면서 삶이란 여정의 끝은 결국 만남과 이별의 끝이란 걸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운명처럼 수없는 만남과 이별을 겪게 될 것이다.

주인공 로잰느는 활동적이며 고령의 나이에도 독립적이고 삶에 전혀 궁색함이 없어 보인다. 외모에서도 자기 관리도 뛰어나고 외로움과 상실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처능력도 뛰어나다. 이런 할머니를 현실에서 만나기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얼마 전 방문한 경로당 풍경이 떠오른다. 방문을 열자 넓은 방에 스무명 가까운 어르신들이 두 패로 나뉘어 화투를 치고 계셨다. 그 열기가 보일러와 함께 방안의 온도를 높이고 있었는데 “어르신, 젊은 사람들이 와서 그림책도 읽어드리고 만들기도 하고 해 드릴까요?” 했더니 단호박이다. “화투가 젤 재밌다. 인지 배워서 뭐 하노?” “배우는 거 싫으세요? 책에도 그림 많은데!”했더니 “인자 골치 아픈 거 싫다!”하신다.

“나이 들면 얼른 죽어야지.” 민여사의 입버릇이다. 하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혼자가 된 민여사는 언제부턴가 꽃나무가 죽는 게 싫다며 꽃 키우는 일을 그만 뒀다. ‘인지 배워서 뭐 하노!’라는 경로당 어르신들도 민여사도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별이 두려워 시작도 두려운 것이다.

“어머님 연세 85세면 치매 안 걸리면 행복한 거야”라고 하는데 홀로 아파트에서 저녁을 맞으시는 민여사의 노년은 너무나 쓸쓸해 보인다. 예전의 꽃을 키우며 타령조의 이야기를 흥얼거리던 민여사의 모습이 그립다. 우리의 삶이 저녁까지 아름다울 순 없는지 로잰느와 민여사와 경로당 어르신들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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