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의 로망
밥 한 그릇의 로망
  • 승인 2016.04.1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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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마트에 들어선 남편은 곧장 생선코너 앞에서 장승처럼 서 있다. “저녁은 따신 밥에 고등어 구워서 먹자” 라며 내 눈치를 살핀다. “안 돼요 집안을 온통 고등어 냄새로 도배할 순 없어요.” 나의 단호한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마트를 도는 내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쇼핑카트를 거칠게 몰았다.

그래도 고등어가 눈에 밟혔는지 내 등 뒤에 바싹 따라 붙어서는 “화덕하나 살까. 석쇠랑 연탄도 몇 장 들여 바깥에서 구워 먹으면 안 되겠나? 간장양념 만들어 고갈비처럼 해 먹고 싶다.” 남편의 애원에도 아랑곳 않고 내가 담은 물품만 계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속이 상했는지 “그깟 고등어 안 먹고 만다”며 다신 고등어 ‘고’자도 꺼내지 않겠다며 얼굴을 붉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괜히 애꿎은 TV 리모컨에 심술을 부리는 것을 보니 ‘까짓것 비린 냄새가 집안에 등천을 하고 사나흘 창문을 열어놓고 살지라도 고등어 한 마리 구워줄걸 그랬나.’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깟 고등어 한 마리 굽는 게 뭐라고 비싼 꽃 등심 구워달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 고등어 한 마리 구워달라는 소릴 안 하는 것을 보니 내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미안한 맘으로 남아있다.

음식은 봉인 되었던 추억을 풀어내는 힘을 지닌 듯하다. 남편은 어쩌면 고등어 한 마리 속에 잘 구워진 옛 추억이 있을지 모른다. 포장마차 구석진 자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고갈비에 소주 잔 거하게 기울이던 청춘의 한 때, 그 시절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서부도서관 앞에 고등어 정식을 잘하는 집이 있다. 가끔 글 손님이 오면 그 집으로 모셔 잘 구워진 고등어를 대접하곤 하는데, 남자 분들이 특히 고등어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유독 고등어에 많은 추억들이 배여 있음을 듣게 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작은 조각들 몇 개를 이어 붙여 만든 밥상보를 새색시 마냥 곱게 덮어쓰고 일 나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던 개다리소반이 생각난다.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밥상 위에서 기꺼이 한 몸 보시를 기다리고 있던 간고등어와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아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고봉밥 한 그릇은 따뜻하면서도 비린 유년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일터에서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가 상보를 걷어내면 된장찌개와 함께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등어 한 마리는 가장의 힘겨웠던 하루의 노고를 보상하는 어머니만의 특별한 정성이었다.

흔히들 경상도 남자들이 집에 들어오면 딱 세 마디만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중 첫째가 ‘밥 도’ 다.

남자들에게 있어 ‘밥 한 그릇’의 의미는 무엇일까? 밥 한 그릇에 남자들이 큰 의미를 두는듯한 표현들이 많다. ‘마누라한테 밥은 얻어먹고 사냐’, ‘밥 한 그릇 배부르게 먹었더니 정승 판서가 안 부럽다’, ‘배가 부르니 세상이 눈 아래로 보인다’는 식이다. 생각건대 남자들의 로망은 아마도 잘 차려진 밥 한 그릇 먹는데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친정집으로 불쑥 퇴근한 남편은 친정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밥솥 째 뚝딱 비우더니 “장모님 참말로 밥 잘 묵었심더” 라며 지갑을 열어 만 원권 지폐를 몇 장 꺼내 밥값이라며 엄마 손에 쥐어줬다. 남편의 이러한 돌발행동에 어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사위의 뜻을 알아채고는 얼굴에 화색이 활짝 돌았다. 남편이 뜬 밥숟갈에 고등어의 살을 발라 올려주며 “아이고 우리 밥서방 고맙네!” 라며 연신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당신이 해 주신 밥을 정성껏 먹어주는 사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한 끼의 정성을 알아주는 사위가 고맙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혹시 딸년이 사위에게 부실하게 차린 밥상을 들이밀지 않았는지 은근히 물어 봤을 수도 있었을 테다.

우리네 습속에, 쉰 음식은 자기가 먹을지언정 손님에게는 따끈한 새 밥 한상 차려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미덕이었다. 심지어 밥을 구걸하는 거지에게도 밥상을 차려 내 줄 정도로 밥에 대한 예의가 분명했다.

각다분한 세상으로 나가 가족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는 남자들의 수고가 한 그릇의 밥으로 보상 된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며칠 비린내를 인내하고서라도 오늘은 간이 잘 밴 자반고등어 한 마리 구워 밥상에 올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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