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그 작은 불씨
선물, 그 작은 불씨
  • 승인 2016.04.1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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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락
수필가
이박삼일 동안 자연인과 함께 생활하고 헤어지는 날, 서로는 아쉬움을 달래며 자그마한 선물을 주고받는다. 주최 측에서는 주로 운동복이나 모자 등을 전달하지만, 그날 먹고 사는 데 자족하는 자연인이 줄 거라고는 특별한 게 없다. 한사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창고를 뒤져서라도 무엇 하나 쥐여 보낸다. 심심풀이로 나무를 다듬어 만든 조각품이며 자연에서 채취한 것으로 담은 술, 아니면 장아찌 등 반찬 종류이다. 항상 헤어질 때는 부둥켜안고 코끝을 찡하게 한다. 요즘 수요일 밤이면 만사 제쳐놓고 보는 한 방송프로 장면이다.

누구나 선물을 주고받으면 흐뭇해진다. 더러는 부담스러운 선물도 있지만, 그건 저의가 바람직하지 않거나 분에 넘치는 것일 수 있다. 작으나마 진심 어린 마음의 표시가 중요하다. 그 선물이 오래도록 혹은 평생 마음에 간직하는 경우가 있어 받는 사람에겐 크나큰 획을 긋기도 한다. 원하지 않는 것을 베풀어 놓고 은근히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례를 떠나 황당하다. 선물은 즉흥적으로 우러나는 것으로 계획적이 아니었으면 한다. 상대에 따라 기쁨이 배가 된다. 그 선물 하나로 살아가는 데 큰 기폭제가 된다면 축복이며 성공한 삶이리라.

얼마 전, 나에게도 선물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막상 퇴직을 앞두니 홀가분하면서도 한편 마음이 뒤숭숭함도 감출 수가 없었다. 주변 동료가 섭섭하다며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가 하면 술자리에서 그간 아쉬움을 달래고 노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이어서 자연스레 선물을 내어놓는 자리로 이어졌다. 어떤 이는 곱게 포장한 목도리 등 생활필수품을, 어떤 모임에서는 전별금이며 공로패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 나름대로 깊이 궁리한 것들이리라. 평소 선물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지 못한 난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중 여태 나를 잡아끄는 게 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대지에서 봄풀이 머리를 내밀 듯 틈새 없는 이 마음에 뭔가 움트게 만들었다. 수줍은 아가씨였다. 말수가 적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라고는 전혀 못 하는 참한 규수 감이다. 싱긋 미소가 예쁘고 뽀얀 피부에 건강미도 넘쳐난다. 책상위에 사뿐히 얹어놓고는 혹시 필요할지 모르겠다며 쑥스러워했다. 두툼한 프린트물이었다. 얼핏 오십 장도 넘어 보였는데 다름 아닌 수년 전부터 모 언론사에 실은 나의 칼럼이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으로 그동안 발표했던 글을 사진과 함께 스크랩한 것이다.

‘아니, 이걸 어떻게…’ 난 입이 벌어졌다. 사진도 그때 얼굴이었다. 다소 젊고 생생한 그 시절의 모습들, 어찌 이런 것을 전하리라는 생각을 가졌을까. 아마도 그녀는 이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고, 기뻐할 것이 뭣인가를 많이 생각했던 모양이다. 분명 퇴직하는 이 시기에 값어치가 있을 거라는 것을 예감했으리라. 정성에 마음이 따사로워진다. 그러면서도 별거 아니라며 수줍어하고 있으니 나 또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동안 별로 베푼 것도 없었건만, 이런 특별한 선물을 받아 흥분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글 속에는 잊어버렸던 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시 일깨워주려는 듯 생명이 꿈틀거렸다.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 창작을 통해 힘차게 딛고 용기를 내지 않았던가. 국채보상공원을 거닐며 봄꽃에 취하기도하고 돌에 새겨놓은 옛 시인의 글에 감동했던 일이며 신천 콘크리트 벽에서 피어나는 한 민들레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았고 또 전통시장에서 구수한 장터 인심을 접하며 무던한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반생의 상상력과 감정으로 풀어놓았던 결실이었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마다 올곧게 지탱해준 흔적들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알아채지 못할 눈과 표현해내지 못할 언어를 가지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삶이 왜소하고 힘든 역경이 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는 것, 오직 민낯으로 보편적 삶을 살려고 했던 옹골참의 기개였다. 잃은 것보단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여긴다. 혹여 글을 쓴답시고 다른 일에 소홀하지는 않았을까, 늘 우려스러웠다. 제대로 된 글 진솔한 글 한 편 쓰지 못해 애태우는 나에게 불현듯 그녀가 건넨 선물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을 줄이야. 새삼 눈물겹도록 고마울 따름이다.

다시금 나를 돌이켜 보게 한 것, 지금 이 순간 여러 길이 있다면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금 살리는 길이 더욱 값지리라. 저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가 더 활활 타오르는 잉걸불로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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