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북한식당의 진풍경을 보면서
해외 북한식당의 진풍경을 보면서
  • 승인 2016.04.2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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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작가회의 공동의장·시인
내가 맨 먼저 북한식당에 가게 된 것은 1999년 제1차 만주기행 때였다. 첫 만주기행이었던 만큼, 친구따라 처음 만주땅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첫 만주기행이었기에 모든 것이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화룡이라는 델 갔는데 화룡의 원로 조선족시인 김문회 어른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이 이끄는 대로 점심식사를 하러 간 곳인데 식당 건물이 중조식당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식당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계단을 밟고 2층에 올라가니 좌우양측에 방이 어러 개 있었으며 방 입구마다 진달래, 해당화, 도라지..... 등 이름이 붙여져 있었으며, 김일성 뱃지를 단 북한처녀들이 분주하게 주문도 받고 음식도 나르고 있었다. 그땐 중조식당이라는 이름이 궁금해 물어봤더니 중국과 조선(북한)이 합작하기에 중조(中朝)라 한다는 걸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 후로 세월이 5년 정도 흘렀을까. 한국에서 간 우리일행끼리는 요령이 없어 갈 수 없는 북한식당이었고 잊고 지냈는데 연길의 조선족시인들 문학행사에 참여하다 보니, 우릴 대접한다고 꼭 북한식당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북한식당에는 술과 음식 뿐만 아니라 가무가 곁들여지기에, 한국인이나 중국 조선족이나 북한주민 모두 동족이기에 같은 값이면 이런 기회에 북한처녀들 가무도 보라고 배려하는 미덕이었다.

그래서 연길서에는 유경호텔이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유경호텔에 평양관이 있는데 북한에서 경영하는 식당이었다. 사적으로 내 동료 조선족시인도 유경호텔에서 나를 대접하며 가장 이름난 곳이라며 나에게 성의를 표했던 기억이 있으며 이곳 외에도 연길에는 한성호텔 등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여럿 있었다.

내가 말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국에서 간 우리들은 반가워 어쩔 줄 모를 정도인데, 그들은 개인이 경영하는 식당이 아니라 북한당국에서 운영하는 식당으로 북한에서 뽑혀온 이들이며 철저히 주체사상 교육을 받고 3년 정도 근무하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여기에 첫 번째 그 슬픔이 있으며 두 번째로는 식당수입의 일부만 월급(한국화폐 단위로 4만원정도)으로 지불되는 것 뿐, 완전 외화벌이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동족이면서 서로 마음 놓고 말을 건낼 수 없고 동족이면서 기념사진도 마구 찍을 수 없고 동족이면서 함부로 팁도 줄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거기다가 그들은 북한의 가무단 출신들이 아니라는데 있다. 평양출신으로 평양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온 신분이 확실하며 일정교육을 받고 해외로 파견 나와 온갖 감시를 받으며 근무한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나? 하겠지만 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들인 것이다. 누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고 해서 김정은을 향해서 보상하라. 사과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평양에서 왔수다. 평양xx대학 4년 졸업하고 3년이 다 되어가요. 곧 평양으로 들어가는데 미국놈들은 원쑤에요. 잊을 수가 없어요’하는 거였다. 당당한 북한처녀들이 슬퍼 보였다. 미국인들이 왜 원쑤인가 하고 물어봤자 허언이 될 거고, 또 손님과 접촉한 말이 모두 위로 보고된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이젠 내가 물었다. ‘곧 평양으로 돌아가면 뭐해요?‘ 하니까 ’당국의 부름을 기다려야지요‘ 하는 거였다. 나는 재빨리 또 다른 식당으로 파견 나가느냐고 물으니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북한 당국에서 정해준 대로 간다는 거였다. 여기서 내가 또 놀란 것은 개인의 특성이나 개성은 발휘되지 못하고 오로지 울안의 도야지나 닭 사육하는 체제 다름없구나(비유가 좀 거친 것 같지만) 싶었다.

다 내 딸냄이 같이 나이의 이쁘고 맵시 있는 스물 한두 살의 북한 처녀들이었다. 그들은 무슨 운명을 타고 났기에 울안의 도야지나 닭장 안 닭, 거위처럼 방목 되지 못하고 날마다 똑 같은 소리와 제스츄어를 연출하면서 그게 인생의 최고 행복인 양 손님을 맞이하는가 말이다. 이래서 아직도 김일성은 위대하고 주체사상탑이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처럼 하늘을 찌르고 군대에 가면 7년~10년을 집에도 가지 못하고 부모도 못 보고 한단 말인가.

이래도 정치인들은 곧 개성공단을 재개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말이다. 오히려 여러 권의 검인정 국사교과서가 획일적인 집필자에 의해 떳떳하게 북한 비판을 주저하고 오히려 한 권의 국정교과서로 바로 잡겠다는데 독재적인 발상이라고 항의하고 있는가 말이다. 친북이나 종북 냄새가 짙게 나는데도 아니라 그러니 통탄할 일 아닌가. 분명히 말하지만 국사교과서 뿐만이 아니겠지만 친북도 종북도 친일도 되어선 안되는 범위를 강조해 두고자 한다.

해외 북한식당에서 근무하던 북한 젊은 처녀들이 집단으로 한국으로 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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