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의 죽음과 그 진실
한 소녀의 죽음과 그 진실
  • 승인 2016.05.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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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규
경북대학교 교수
경남 밀양에서 전해지는 ‘아랑 이야기’는 한 소녀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소개하는 이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밀양 사또의 딸이었던 아랑은 어느 날 그 고을 아전과 유모의 음모에 휘말려 영남루에 나갔다가 아전에게 욕을 당하게 되었다.

아랑은 온 힘을 다해 항거하지만 끝내 아전에게 피살되고 그 시체는 강가 숲으로 던져지게 된다.

별안간 딸을 잃은 아버지는 사또 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 뒤로 신관이 부임할 때마다 그날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신관은 기절하여 죽고 만다.

밀양 사또로 가고자 하는 자가 없자, 조정에서는 자원자를 구하여 내려 보낸다.

신임 사또가 촛불을 밝히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며 방문이 열리고, 산발한 채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여인이 목에 칼을 꽂은 채 나타났다. 그 여인은 바로 아랑.

아랑은 사또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준다. 신임 사또는 이튿날 범인을 잡아 처형한다.

이런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류의 공포물에서 거듭 이야기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꽤 익숙하다.

TV 공포물에서 이 이야기를 다룰 때 강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혼이 등장하는 순간의 공포이다.

그 후 원혼으로부터 진실을 알게 된 신임 사또가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는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이 이야기를 공포물의 문법으로 읽지 않고, 한 소녀의 의문의 죽음과 그 진실에 초점을 두고 읽는다면 어떨까? 진실을 꼭 전해야만 했던 공동체의 이야기 윤리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원혼의 등장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장치에 불과하다. 이런 장치를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전해야만 했던 사정이 중요하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전한 이들에게 있어 소녀의 죽음은 원혼을 등장시켜서라도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만 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무고한 이의 죽음 앞에서 의분을 느낀다. 죽은 이가 항거할 힘이 없는 상태였다면 더욱 그렇다.

또 어떤 죽음은 그 시대의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경우 죽음의 진실은 파묻히기 쉽다.

죽음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죽음에 직접 책임이 있거나 이를 방조한 체제의 추악함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죽음의 진실을 덮으려는 권력의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랑의 죽음은 그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랑의 아버지 전임 사또의 행적을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아랑의 아버지는 어떤 판본에서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하고 파임을 자청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하고, 또 다른 판본에서는 아랑을 찾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도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아랑은 왜’라는 소설에서 아랑의 아버지인 전임 사또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전임 사또도 아랑의 죽음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황급히 밀양 땅을 등져야 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혹시 사또가 아랑을 죽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의문에 대해 이야기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가 침묵하는 지점에서 허구적 상상력을 발휘해 본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시대의 모순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가부장제의 모순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 소녀의 죽음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것은 마땅한 판단일 것이다!

아랑이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저 야만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16년의 4월과 5월, 대한민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근대국가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수많은 무고한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실이 가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만큼만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 인간 존중, 생명 존중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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