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의 꿈
플라타너스의 꿈
  • 승인 2016.06.1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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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유월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동감 넘치는 삶의 자세를 배우게 한다. 찬란한 봄의 기운을 받아 연록에서 진록으로 우럭우럭 잎들을 키워가는 플라타너스들, 비록 공해에 찌들어 시커멓게 변한 가지 끝에서도 푸른 잎들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다. 커다랗고 무성한 잎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6월의 파란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란 하늘에 젖어있다’/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가 문득 생각난다. “네 꿈은 뭐지?”, 아니 “내 꿈은 뭐였지?” 꿈이란 자신이 존재하고픈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중년의 여자는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갈까? ‘세상 모든 여자의 꿈은 혼자 여행가는 것’이라는 글귀를 본적 있다. 혼자만의 여행, 그것은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혼자만의 긴 여행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 여자의 꿈도 그랬다.

띵~출입문에 달린 종이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마치 티베트의 깊은 산사에서 용맹 정진하는 수행자의 정신처럼 청정하게 울려 퍼진다. 그 곳에 가면 미용실이라기보다 마치 북 카페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든다. 각종 미용재료와 화장품 샘플보다 더 많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미용실에는 그녀가 사서처럼 보인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길이 박자를 놓쳤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어서 오세요.”라고 잠깐 인사를 건네고는, 망망대해에서 겨우 건져낸 시적 영감이 도망이라도 칠세라 허둥지둥 펜부터 잡는다. 두어 평 남짓한 바닥엔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낙엽처럼 수북이 쌓여있고, 오래된 빗자루가 귀퉁이에서 숨이 넘어갈 듯 붙어 서있다.

손님을 대하는 상냥함보다 글에 몰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손님으로 하여금 오히려 알 수 없는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하지만 미용실을 찾는 누구 하나 그런 그녀의 태도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꿈은 시인이었다. 생계를 위해 열었던 미용실 이였지만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그녀는 모든 시간을 시에 집중시키고 있다. 미용실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푸른색 칠판을 가득 메운 포스트잇에는 손님들의 예약 스케줄보다 시구들이 더 빼곡하다. 미용화보는 한 귀퉁이가 찢어져 빛이 바래고 투명유리로 된 탁자 위에는 잡지책을 대신한 시집이며 문학평론집, 끼적거리다 만 글귀들이 완성을 꿈꾸며 환하게 빛나고 있다.

경상도 여자의 삶에서 가족과 생계 문제를 뒤로하고 꿈을 좇는다는 것은 특별한 외출이다. 그러기에 누구나 꿈을 꿀 수는 있지만 이루기는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가부장적 사고가 강한 이곳에서 여자의 꿈이란 늘 싸다가 만 여행 가방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에 매진하는 그녀가 무척 예뻐 보인다. 잠시 그녀가 손님을 위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손님들은 시를 읽고 인문학 책을 뒤적거린다. 미용실인지 도서관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이 미용실의 특별함이 되었다.

꿈을 꾸는 것에도 자격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어제보다 행복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시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그녀, 작가의 꿈을 이루려는 그녀의 멋있는 도전에 찬사를 보낸다.

벽이 있다면 문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문을 열고, 벽을 넘지 않으면 꿈이란 있었던 것인지 아예 없었던 것인지 모르게 된다. 미용실을 나서니 플라타너스의 넓고 푸른 잎들의 그늘이 시원하다. 시를 다시 읊었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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