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손성완 작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0년 전 대백프라자 전시장에서였다. 그로부터 4개월 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삼도천(三途川)을 건넜을 것이다. 심장마비라라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비통했다. 40년도 못 채운 짧은 생이었다. 안타까운 마음 한켠엔 그의 새로운 창작을 더 볼 수 없다는 것이 미술계의 공통된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조교시절 1년 남짓 그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근면 성실했고 겸손했다. 공식 업무가 끝나면 어김없이 화실로 내달리던 부지런함은 천상 작가였다. 당시 한 아들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던 그는 학업과 작업과 학과조교를 병행했다. 집은 단출했고 곳곳엔 작품들이 즐비했다. 소박한 삶이었다. 초대받은 조교일행이 작품에 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거실에 앉았을 때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그가 꺼낸 실화가 실감난다.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든 모양이다. 온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귀중품을 훔쳐 달아난 도둑은 당연히 얄미운 존재다. 놀란 가슴으로 가쁜 숨을 돌리는데 은근히 화가 치밀더라는 것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실토한 그 이유는 작품만 무탈했기 때문이란다. 순간 작가를 몰라본 도둑을 고마워해야할지 책망해야할지, 종종 그는 재치 있는 입담과 넉넉한 배려로 주위를 밝혔다.
단체 특강이 있던 날이었다. 특강실로 가려면 회전문을 지나야하는데 공교롭게도 손 작가만 문 안에서 옴짝달싹 못한다. 문의 회전 속도와 어긋난 발이 문밖으로 나올 타이밍을 놓친 거다. 구원의 손길이 닿았을 때는 이미 이마에 덩그러니 혹 하나가 생긴 후였다. 노을 진 석양처럼 붉고 큰 혹을 달고 강의실에 나타나 좌중을 폭소케 하던 모습이 선명하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집념은 야멸찰 만큼 진지했다. 한지와 먹의 하모니로 한국화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했던 손 작가의 작업은 시대를 한발 앞서갔다. 소재를 면밀히 검토하고 대상의 감정을 이해한 후 정신을 작품으로 체득해 간다는 ‘천상(遷想)’은 고개지(顧愷之)의 ‘천상묘득(遷想妙得)’을 차용했다고 한바 있다. 이제 그는 천상(天上)작가가 되어 화두로 삼은 ‘천상(遷想)’을 화우들과 공유한다.
2008년 5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의 첫 유작전보다 아양아트센터의 ‘오월에’전은 규모가 축소된 듯하다. 그러나 그를 아끼는 스승과 화우들이 마련한 장인만큼 규모의 대소는 잠시 접고 볼일이다. 초원의 진면목은 풀 한포기로부터 시작되듯 전시는 작품과 기획자와 평론가 그리고 관람자가 함께 완성해가는 또 하나의 큰 작품이다. 치열한 작업과 성실한 삶이었던 요절작가의 작품이 삶과 예술은 한편임을 실감케 한다. 번거로울 텐데 서로 주고받아야 할 말과 일에 때를 늦추지 않는 벗들의 노고도 본받을만하다.
운명이 해결 못하는 것을 우정이 나서서 상생을 도모한다. 작가는 가고 예술만 남았어도 이어지는 추모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과 예술을 이해하는 진정한 벗이 있어 가능할 것이다. 천상 작가 손성완과 벗들의 해후(邂逅)가 그렇다. 지쳐가는 미술계에 활력이 되는 적절한 만남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