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떼 넣은 감자수제비
발로 떼 넣은 감자수제비
  • 승인 2016.07.0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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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비가 오려나 보다. 구름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공중에 띄워 던져놓은 것 같다. 마치 옛날 아버지와 함께 끓여먹던 감자수제비 같다. 이런 날이면 아버지가 수제비 같은 구름 속에서 하얗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는 듯하다.

비가 오는 날은 왠지 방안이 적막해진다.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까닭모를 눈물이 새어 나오고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울어 버리고 싶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오늘 따라 몹시도 그리워진다.

아버지는 24절기 중 11번째 절기인 하지(夏至)의 가장 대표음식인 감자를 넣은 감자수제비를 무척 좋아 하셨다.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夏至)는 농경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절기로서의 존재감이 매우 컸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하지의 전통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장마가 시작되는 무렵이자 앞으로 다가올 무더위에 대비하기 위해 제철 음식을 먹어두면 좋은 때기도 하다. 장마철에는 수분을 적당히 머금고 단맛과 포슬포슬한 식감이 좋은 하지감자를 넣은 수제비야 말로 가장 제격인 제철음식이 아닐까 한다. 내게는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은 날, 하지는 그리움도 가장 커지는 날이 되었다.

어렸을 무렵, 수제비는 먹을 게 부족하던 시기에 소중한 끼니였다. 먹을거리가 흔해지면서 수제비는 주식에서 간식이 되었고 추억의 먹을거리로 자리를 내어 주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할머니를 잃고 계모의 눈칫밥에 익숙했다. 한 그릇의 수제비는 주린 배를 채우던 아버지만의 아린 맛은 아니었을까? 수제비 한 그릇은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처럼, 때로는 도려내지 못한 감자 싹처럼, 불쑥불쑥 돋아나게 했을 것이다.

후드득 비가 떨어지면 하늘을 쳐다보던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불렀다. 맏딸인 내게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위로를 받고 싶어 했다. 어쩌면 무엇보다 요리사였던 아버지의 입맛을 가장 잘 알아주는 자식이라 여겼던 탓이었을까.

“큰딸, 아부지 수제비 한 그릇 끓여봐라”

엄마가 더 맛있게 잘 끓일 텐데 왜 매번 내게만 시키시는지 투덜투덜 거리며 밀가루반죽을 치대어 애면글면 수제비를 떼 넣곤 했다.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를 넣고 소금 간을 한 후,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되지도 묽지도 않게 적당히 어우러지면 비닐봉지에 담아 밀봉한 후 냉장고에서 한 시간 정도 아버지의 추억을 숙성시켰다. 자연스레 어우러진 후 꺼내어 반죽을 하면 쫀득쫀득해지며 맛 또한 일품이 된다. 아버지를 감동시키는 나만의 요리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봉지 안에서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육수를 끓인다. 큼직한 냄비에 속을 제거한 멸치와 다시마, 무, 양파 등등 갖가지 채소를 넣고 오랜 시간 뭉근히 끓인 후 건더기를 건져낸다. 말간 국물에 분이 풀풀 나는 감자를 충충 썰어 넣는다. 감자가 살포시 익기 시작하면 반죽을 꺼내어 손으로 굴려가며 알뜰살뜰 치댄다. 행복하게 웃을 때의 입 크기만 하게 반죽을 떼어 사뿐사뿐 한 장, 한 장 얇게 펴서 떼어 넣는다. 모든 준비를 잘했다 하더라도 이때에 이르러 정신을 놓으면 그간의 정성이 수포로 돌아가는 수도 있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계란지단으로 만든 흰색과 노란색의 꾸미를 가지런하게 올리는 일이다. 먹어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특별함을 전하기 위함이 첫 번째요. 정성 다함을 보이기 위함이 두 번째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대접 거뜬히 비운 아버지는 그제야 맛있다는 말 대신

“딸내미, 수제비를 손으로 뗐나 발로 뗐나?”

하시고는 아버지의 남모를 슬픔이 눈 녹듯 사라지셨는지 껄껄 웃으시곤 했다. 어쩌면 수제비는 아버지와 나만의 소통의 맛이요, 힘을 돋우는 충전의 맛이었으리라.

얼마 전, 비 오던 날 느닷없이 친정엄마가 찾아오셨다. 신발을 벗으시며 아직 방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나에게 말씀하셨다. “큰딸, 발로 떼 넣은 수제비가 먹고 싶은데” 하신다. 가까이 살면서도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지 못했는데, 갑자기 수제비라니. 아하, 엄마도 내색은 않으시지만 내심 아버지가 그리우셨나 싶다.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음식은 봉인 되었던 추억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을 지녔다. 비가 오는 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좋은 날, 그리움으로 우려낸 육수에다 한 장 한 장 추억의 수제비를 띄우는 삶이 한바탕 소나기 지나간 삶처럼 시원하기를 바란다. 웃비가 걷히니 비탈진 산허리,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길을 힘차게 달려가는 아버지가 잠시 보였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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