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대를 다질 때
토대를 다질 때
  • 승인 2016.07.0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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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
대구미술비평연구회
대작과 위작 논란으로 미술계는 시름이 깊다.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예술을 보면서도 예술이 그립다. 답은 아니지만 동심만한 위안이 있을까. 며칠 전 대구은행 로비에 펼쳐놓은 어린이들 그림에 푹 빠졌다. 유명하거나 고가도 아니지만 어린이들만의 꿈과 현실이 조합된 맑은 풍경이 낯선 듯 낯설지 않았다. 손색없는 경쾌함 덕에 동심과 오롯이 호흡할 수 있어 좋았다.

그들의 그림 일면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를 생각나게 했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육신은 카논(canon)의 규칙을 깡그리 무시했고 원근법과 투시도법 음영법 따위도 알기 전인 듯하다. 주대종소의 화면구성에 무지개 색 하늘은 천국인가 싶다. 오색나무열매와 각종 동물들 그리고 꽃송이마저 초현실주의와 야수파 입체파 등, 여러 미술양식을 총집결해놓은 듯하다. 아마도 지식인의 두뇌라면 숙맥 같은 표현 천지라 할 만하다. 그토록 불명료한 그림을 충분히 이해한 것을 논리로는 답할 길이 없다. 더하여 헛헛하던 마음까지 밝아졌으니 말이나 글을 덧댄다면 오히려 사족이 될 것이다. 그림이라는 장르에 아이들의 순수함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 한 점, 특히 꿈을 조랑조랑 매단 ‘소원나무’ 그림이 인상적이다. <파레아나의 편지>만큼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파레아나의 편지(Pollyanna, 1913)>는 엘리너 포터의 소설이다. 20년 전 내게 ‘기쁨’을 전해준 책으로 기억한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가난한 목사의 딸 파레아나는 자선단체에 인형을 받고 싶은 마음을 편지로 보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팡이가 당도하자 실망한다. 선물을 사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우는 딸을 달래며 고난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게임을 제안한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게임은 세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일종의 마음게임이다. 덕분에 파레아나는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기쁨전도사와 같은 삶을 산다.” 파레아나이즘, 파레아나이쉬라는 말이 사전에 등록될 만큼 긍정적인 삶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주인공이 바로 파레아나다.

은행 로비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들도 파레아나의 밝은 모습에 버금갔다. 도움의 손길을 차치하더라도 하나같이 명랑했다. 하여 그들과 파레아나를 동일시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른의 손길이 아이들의 순수함을 덮친 부분이 아쉬웠지만 대부분 파레아나의 동심 같은 세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나 어릴 적에도 저랬나 싶을 만큼. 그러나 그토록 밝은 세상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갔다.

얼마 전 유치원생들 사이에 일어난 성범죄사건기사를 보고 소스라쳤다. 너무 어린 나이기에 법에도 기댈 수도 없는 처지란다. 원인은 유해한 미디어의 부분별한 과다노출에 무게를 싣는다. 어른들의 욕망과 방심이 아이들의 투명한 정신세계를 멍들게 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기가 막힌 사건은 이 밖에도 여럿 된다. 상처받은 당사자와 부모님 그리고 국민들에게 희망의 전도사 <파레아나의 편지>라도 위로가 될까. 어른들의 책무를 통감하며 아이들의 삶을 방향 잡아줄 견고한 발판마련이 시급하다. 여러 가지 방도가 있겠지만 필자는 교육에 주목하고 싶다.

현재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예능교육만 보더라도 불균형한 상태다. 주요 입시교과목에 밀려 3학년 땐 미술수업 시간이 아예 없다. 엄밀히 따지면 초등학교 이후부터 활발한 미술교육의 맥은 약해진 셈이다. 정서순화와 심신의 안정, 신체리듬의 조율은 특정 시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교육이 불균등한 토양에선 훌륭한 인격도 기대하기 어렵다. 예리한 시각으로 시대를 선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결과만이 교육의 본령은 아닐 것이다. 작고 가까운 것의 가치부터 살피고 적절한 시기에 양질의 교육을 실천함이 옳다.

격식도 위엄도 없는 은행 로비에서 불특정행인들을 미소 짓게 하던 어린 영혼들의 맑은 그림이 어른이 나로서는 잊지 못할 여운이다. 곧 그 밝은 꿈들이 그림 속을 차고 나와 현실에서 나래 짓 할 차례다. 그 희망의 씨앗들이 마음 놓고 발아할 수 있도록 어른들은 탄탄한 바탕을 다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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