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미술, 그 고루함과 지루함
동시대미술, 그 고루함과 지루함
  • 승인 2016.07.1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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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
미술평론가
트리스탄 차라, 게오르게 그로스, 한스 리히터, 후고 발 등의 예술가들은 1916년 7월 취리히에서 새로운 운동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바로 1914~19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인 ‘다다(dada)’다. 이 운동의 목표는 ‘심미적이고 편협한 도덕주의와 설명적인 복제, 무기력해진 모든 것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무자비함의 시대로 들어서게 한 1차 세계대전이 남긴 후유증 아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회의, 생각의 방법으로 판단되는 것들을 거부한 ‘다다’는 본능이나 자발성, 불합리성을 중시하면서 기존 체계와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했다.

그러면서 다다는 스스로의 부정을 통한 성장이라는 교훈을 남겼고, 후배들이 차별화된 미적 태도와 다양한 방법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자유’까지 열어 놨다.

정확히 1세기가 지난 2016년 7월 현재, 아쉽게도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에게 차별화된 미적 태도는 특별한 관심사가 아닌 듯 보인다.

기존의 것을 전복해 어떤 결과물로 고착시키는 능력과 그것의 실천 및 배양에도 별다른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일부를 제외하곤 어쩌면 나와 세상을 관통하는 철학이랄 수 있는 무의미의 의미(반의미)나 의미의 무의미에조차 무관심한 편이다.

그저 미적 가치판단의 불가능성 속에서 동시대라는 갈대밭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가시적인 부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현장에 있다 보면 이 그림이 그 그림 같고 그 그림이 이 그림 같은 게 참으로 많다.

때론 아까 보았던 그림이 또 걸려 있나 착각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길을 끌지도, 호기심을 유발하지도, 특성도 없는 작품들이다. 이뿐이랴, ‘다다’가 건네준 자유는 취향공동체에 읍소하며 그들이 하사하는 자본과 교환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 유행에 젖어 엇비슷하거나 변별력 없는 조형을 비판 의식 없이 수두룩하게 만들어냈다.

내적인 곳에서도 이렇다 할 매력은 없다.

현장에는 키리코의 후예들, 네오 라우흐나 바젤리츠, 데이비드 호크니의 후배들이 득시글하다. 여기에 1960년대와 21세기라는 긴 거리만큼 무엇이, 어떻게, 왜 다른지를 제시하지 못하는 근거 빈약한 팝아트의 제자들, 역대 개념미술과 회화 작가들을 노골적으로 흉내 낸 아류도 드물지 않다. 분명 다른 토양, 다른 문화, 다른 모더니티 아래 삶을 영위했을 터인데, 어찌 그리도 서구유령들의 교하생, 문하생들이 많은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몇몇 작가들은 그것을 가리켜 오마주 혹은 맥락의 재해석이라 말한다.

내용이야 그렇다 쳐도 다원주의 시대에 방법론이 뭐가 문제냐고도 묻는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재능 없는 이들의 지루한 변명이요, 앞선 서구 세대의 짙은 그늘에 고의적이고 무기력하게 몸을 숨기고 있음을 감추려는 뻔뻔한 레퍼토리이기 일쑤다.

이런 상황, 즉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만 뒤적여도 알 수 있는 구닥다리 형식과 개념을 마치 새로운 냥 펼쳐놓는 무모함을 접할 땐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작 스승은 제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느 나라에서 공부하다 왔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작품들에선 차라리 씁쓸함마저 느껴진다.

여기에 ‘다이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전시들, 기획화 되고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걸맞게 복사기처럼 대량생산하고 휘발되는 구조에서의 미적 태도란 서글프기까지 하다.

재밌는 것은 구분의 측면에선 예술의 안과 밖이 없으나, 평가적 측면에선 한 없이 측은한 이런 류의 예술에 새로운 관점, 새로운 시각이란 거짓 명패를 수여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훈장처럼 삼는 이들이 꽤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철지난 예술을 버젓이 재탕하면서도 독창적인 냥 하는 모습에선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것처럼 보잘것없음에 사상과 가치를 부여하고 적용시키는 예술의 음모, 동시대미술의 지독한 이중성까지 엿본다.

이에 예술가의 삶을 존경하는 것과 예술의 가치는 구분되어야한다고 믿는 필자는 가끔씩 독백으로나마 자기만의 신념,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묻곤 한다.

충분히 변형된 전쟁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시각예술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가 예술이라 칭하는 그것이 스스로 예술작품일 수 있음을 어떻게 입증하고 있으며 그 존재이유와 방식에 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가를 자문한다. 관심도, 듣지도 않을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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