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추억을 긁어주다
애인의 추억을 긁어주다
  • 승인 2016.08.0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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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늦은 점심이다. 방바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돌덩이 같은 찬밥 한 덩어리 물에 말아 풋고추 몇 개, 반찬을 삼아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혼자 먹는 밥은 차라리 굶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허기를 떠먹은 듯, 속이 헛헛하다.

퇴근한 딸아이가 신제품이라며 효자손 하나를 내민다. 신장개업한 식당에 친구들과 밥을 먹은 후 계산을 하니 개업기념이라며 하나씩 나눠 주었다고 한다. 딸아이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만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며, 여러 가지 색깔들 중에 엄마가 좋아하는 연두색으로 받아왔다고 한다. 효자손은 대나무나 편백나무로 된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딸아이가 건네준 것은 쇠로 만든 것이다. 셀프카메라의 손잡이처럼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거리조절기능까지 있다.

거리를 조절한 후 등 깊숙이 밀어 넣어 등을 긁어본다. 시원하긴 하지만 쇠가 몸에 닿는 느낌이 왠지 날선 칼날 같다. 홀로 앉아 등을 긁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청상의 늙은 아낙처럼 쓸쓸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눈가의 주름을 확인하는 것이 싫어 거울 앞에 앉은 지도 꽤 오래 되었건만 이젠 효자손까지 빌려야하나 싶어 울적해진다. ‘벌써 이 나이까지 왔나’ 어리석게도 나만은 비껴갈 줄 알았던 세월이었다.

부부가 백년해로를 해야 할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서로 등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등이 가려울 때, 아무리 팔을 뒤로 재껴도 시원하게 긁을 수가 없다. 닿을 듯 말듯 하는 아쉬움과 속상함은 당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이런 낭패에 놓여 있을 때 남편의 따뜻한 손은 천만 구원병을 얻은 장수의 마음이나 같다. 우리부부에게도 등 긁어주는 재미로 사는 시간이 다가온 걸까.

나이 오십 세를 일러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하늘 뜻을 쉬이 안다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럼에도 하늘 뜻은 고사하고 남편의 마음 하나조차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연애시절, 그에게 눈이 멀어 있을 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보이고 들리던 것들이 요즘 들어서는 눈을 뻔히 뜨고도 그 뜻을 헤아리기가 버거우니 말이다. 내가 중년이 되고 갱년기를 앓았듯 그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온 것 같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사람들이 40세를 전후로 이전에 가치를 두었던 삶의 목표와 과정에 의문이 생기면서 중년기 위기(Midlife Crisis)가 시작된다고 주장했으니 ‘빈 둥지 증후군’ 도 생길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부쩍 아이들과 친해보려고 남편은 노력 중이다.

가을날, 울긋불긋 붉게 물든 단풍처럼 시도 때도 없이 들끓는 속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삼복의 대구 오후는 골목마다 한 아름 더위를 부려놓았다. 난전에 퍼질고 앉아 풀죽어 있는 갖가지 채소에 연신 찬물을 끼얹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내 남편의 옛 애인이다. 오랜만에 마주앉아 차 한 잔에 슬쩍 옛 추억을 타서 건네니 콩나물을 듬뿍 담아주며 얼마 전, 병원에 가서 무릎에 차오르는 물을 뺐다며 쓸쓸이 웃는다. 그녀와 내가 어느 새 오십 줄에 든 동격의 여자라 생각하니 덩달아 무릎이 시큰 거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에 틀어 쥔 검은 비닐봉지가 내 마음처럼 연신 바스락거린다.

하루를 다 쓴 노을이 내 발목까지 잠겨온다.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청춘은 허락도 없이 왔다가 사라지고, 우리의 삶 또한 흐르는 강물처럼 애써 떠밀지 않아도 자신만의 속도에 맞게 알아서 흘러갈 것이다.

부부란 무엇일까. 서로 다른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살다가 그것마저 함께 공유하게 되는 관계가 아닐까. 음식을 함께 먹으며 식구가 되는 것처럼, 오래 서로 해로하면서 거칠어지고 푸석해져 가려운 곳을 서로 시원하게 긁어주는 일이야말로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오늘, 비록 지나간 사랑이라 하더라도 소중한 추억이기를 바라면서 시원하게 그의 등을 긁어주고 싶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가 일러준 데로 청양고추 팍팍 썰어 넣고 콩나물국을 끓였다. 남편이 현관문을 들어서며 ‘야! 좋은 냄새 나는데’라며 입맛을 다신다. 들뜬 남편 앞에 콩나물국을 얹은 저녁상을 내어놓으며 슬쩍, 옛 애인의 안부도 함께 전한다. 남편이 씨익 웃더니 칼칼한 콩나물국이 시원하다며 한 그릇 더 달라고 그릇을 쑥 내민다. 그의 어깨위에 무겁게 얹힌 지천명 때문에 젊은 한 때 퍼부어대던 질투마저 거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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