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에 가려진 초상(肖像)
초상화에 가려진 초상(肖像)
  • 승인 2016.08.1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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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
대구미술비평연구회·미술학 박사
몇 해 전 책상 앞 벽면 한 가운데에 초상화 한 점을 걸었다. 그 초상화 볼 때면 마음이 평온하다. 어머니께서 그리신 미완의 초상화는 다름 아닌 복사꽃이다. 분홍색 물감을 풀어 꽃잎 칠할 일만 남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내겐 어머니의 초상화나 다름없다.

서양미술사는 어머니의 초상화와는 다른 인물초상화를 무수히 열거한다. 많은 자화상을 남긴 뭉크(Edvard Munch)와 1백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린 쉴레(Egon Schiele)뿐만 아니라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도 평생 초상화 외엔 그린 것이 없을 정도다. 르네상스시대 이후 해부학을 토대로 한 초상화는 조각상보다 그 숫자가 많다. 인물의 용태를 닮게 묘사한 실력자들도 여럿 된다. 이집트시대 때부터 두드러진 초상조각상은 당대의 인물(파라오)을 기념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카메라가 개발된 후(1685년) 촬영이 대중화 되면서부터 화가들에게는 재현상실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을 닮게 그린다고 하여 반드시 초상화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초상화란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의 특징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그러한 특징을 말로는 전달할 수가 없다.”(J.C 라바터 『인상학 연구』1775~1778년). 인물의 외모가 다른 목적에 가려진 경우도 다반사다. 1701년 작(作)인 루이 14세(1638~1715)의 초상화만 보더라도 그렇다. 당시 왕은 걷지도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전장을 배경으로 한 그의 초상화는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도 마찬가지다. 초상화만 보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러 알프스 산맥을 넘는 늠름한 나폴레옹의 인격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과거의 현상만은 아니다. 축제 때면 미대생들은 캠퍼스 그늘에서 행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곤 하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낯익은 풍경이다. 특히 타과 생들에게 큰 호응을 샀는데 실물보다 낫게 그려줄 때 반응도 좋았다. 평생 부인의 초상화를 27점이나 그린 세잔(Paul Cezanne)의 초상화는 기하학적인 형태에 기반을 두어 경직되었고, 뒤러(Albrecht Durer)처럼 비례분할방식을 동원하지 않은 피카소(Pablo Picasso)의 일곱 여인들도 낱낱이 해체된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이유로 화가들은 인물의 원형을 왜곡한다.

나폴레옹과 루이 14세는 왕의 위용과 지위가 묘사되길 바랐을 것이고, 세잔과 피카소는 기형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는 외모보다 내면의 소리에 주목했고 뭉크와 쉴레 역시 내재된 불안 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단 뒤샹(Marcel Duchamp)이나 고깃덩어리 같은 자화상을 그린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간의 실존문제로부터 부조리와 대결한다.

쿨 할 것만 같은 21세기의 젊은이들도 자신이 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기록되길 원한다. 재현을 거부한 이들 초상화에서 공통점 두 가지를 꼽으라면 과시와 성찰이 아닐까. 예술(초상화)은 종종 정주하지 않는 유목민처럼 진리라 여겼던 전통에 반하는 혁명을 시도한다. 아마 현실이 예술을 어렵다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인물과 쏙 빼닮아야할 초상화마저 상징이나 알레고리, 과장과 해체로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분명한건 일련의 일탈이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환기의 의미가 크다. 작가들의 내면을 주목한다면 예술은 더 이상 낯선 가상이 아닌 리얼한 현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시선을 뇌안에 고정시키지 않고 심안과 영안을 함께 뜬다면 금상첨화겠다.

세상만사라고 다를까. 저마다의 초상이 범람하는 세상은 다원화된 만큼 복잡하다. 소통의 부재는 장벽의 두께를 더하고 벽이 두꺼울수록 원망과 불신의 벽도 높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메니니는 “뛰어난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는 그렇지 못한 화가들이 그린 것 보다 양식적 완벽성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인물의 실제 모습과는 닮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과연 재주의 과유불급이다. 삶에서도 중요한 것은 재주 (또는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을 긍정으로 이끌 지혜와 양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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