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화(畵) 한 점의 기억
신화화(畵) 한 점의 기억
  • 승인 2016.09.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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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
대구미술비평연구회·미술학 박사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다. 신화는 다시 작가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상상의 힘은 현실을 뛰어넘는 조형언어를 만들어냈다.

지난여름 세상을 삼킬 듯한 폭염에 얼비치던 신화화 한 점이 그렇다. 그 그림을 스크린에 비추자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약하게 비명도 지른다.

그들이 본 그림은 고야(Francisco Goya)의 <아들을 삼키는 사트루누스 Saturn devouring his son, 1819~1823>다.

사트루누스(또는 크로노스)는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의 아버지다. 그는 누이 레아를 아내로 삼아 6명의 자식을 얻었는데 자식에게 지배권을 빼앗긴다는 신탁이 두려운 나머지 제 자식을 모두 삼켜버리는 비극을 자행한다.

다행히 막내인 제우스만 레아의 속임수로 살아남아 성장한다. 장성한 제우스는 삼켜진 다섯 형제를 구출하고 힘을 합쳐 사트루누스를 제압한다.

그리스신화는 지하에 갇힌 사트루누스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속성에 비유하지만 화가의 상상력은 광기에 먼저 주목했다.

고야는 사트루누스와 처절하게 잡아먹히는 신의 아들을 인간의 광기와 버무렸다. 희번덕거리는 사트루누스의 눈과 피 흘리는 아들은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킬 만큼이다.

학생들이 그림을 보고 탄성이 아닌 비명을 지른 이유이다. 고야의 묘사는 루벤스의 같은 주제의 그림보다 더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

검은 배경도 한 몫을 한다. 신화는 사트루누스를 통해 시간 앞에서는 그 누구도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려하지만 해석의 각도를 달리하면 인간의 잔악함과도 맞닥뜨린다.

신의 모습을 빌린 화가의 상상력은 인간의 추악한 힘과 폭력성을 폭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야가 남긴 ‘검은 그림’은 <1808년 5월 3일의 처형>과 판화집에 수록된 <전쟁의 재난> 등, 여러 점이다. 당시 전쟁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스페인 전역은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과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전쟁 후 스페인 왕정이 복귀했지만 고야는 더 이상 궁정의 수석화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더하여 아내와 사별하고 1792년엔 청각마저 잃게 된다. 당시의 어두운 현실 같은 그의 암울한 내면이 검은 그림 연작에 드러나는데,〈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도 인간의 좌절과 불안 공포 두려움이 반영된 ‘검은 그림’ 연작들 중 한 점이다.

며칠 전에 참석한 인문학강좌에서도 ‘죽음’이 거론됐다.

발제자는 “일본인의 죽음 와카와 하이쿠”에서〈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와는 다른 죽음을 소개했다.

문학 속의 죽음은 지조와 숭고로 그려지기도 한다. 할복(割腹)자살마저도 기저에는 명예를 깔고 있다. 그 민족 특유의 정서와 문화의 이해가 필요한 죽음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죽음이 있지만 산자의 경험 밖이기에 죽음은 늘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렵기에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양한 예술작품이 빛(희망)의 반대편인 어두움과 한데 묶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 중 한 청년의 고백이 체증처럼 맺힌다. “저는 지금 죽어도 미련은 없어요.” 함께 참석했던 여대생의 고백이다. 암담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가 이유라던 그는 푸념보다는 체념의 낯빛을 하고 있었다.

개인의 삶이 사회적인 문제들과 연결되어있다고 볼 때, 대한민국 20대 청년의 꿈을 체념으로 몰고 간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다.

유한한 존재가 당연히 겪는 불안 심리로만 치부하기에 현실은 적나라한 단서들을 제공했다. 태어나기 전 부터 지는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수저론’이 가장 거부하고 싶은 신조어라던 그 청년의 말이 가시 같다.

<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를 그린 고야의 심정처럼 우리의 현실도 먹고 먹히는 참혹한 전쟁터는 아닌지.

역사를 토대로 인생관을 설계할 청년에게 체념보다 꿈을 안내하는 밝은 신화의 창조가 시급하다.

무수한 삶의 이유가 희망에서 자라듯 희망의 삶을 의식적으로 일궈갈 때 먹고 먹히는 비극적인 신화도 멈출 것이다. 대지의 열기를 밀며 폭염은 갔다. <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같던 여름에 대한 기억은 잔존하지만 오는 가을엔 밝은 신화화에 감정이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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