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을 행복하고 재미있게
늙음을 행복하고 재미있게
  • 승인 2016.09.0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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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 아동문학과 강사
“야, 자유다 ~”

눈뜨며 외쳤다. 퇴임 후 첫날을 맞는 기쁨이 몰려온다. 이제 아침마다 학교 앞 도로에서 아이들 다칠세라 등교지도 하며 속 끓일 일도 없다. 하루 종일, 이런저런 걱정으로 조바심을 가지고 학교를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책임 있는 자리를 벗어난 편안함의 행복이다.

시골 베나(베풀고 나눔) 집 앞을 흐르는 강을 따라 올레길을 걷는다. 바람이 온몸을 감싸준다. 행복 인생 출범식 첫날을 축하하듯 속이 확 트인다. 들판을 메우고 있는 초록색 캔버스도 자유로운 영혼들의 축제다. 맑은 공기,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 여유롭게 떠가는 구름, 익어가는 들판의 곡식들까지 움직임이 자유로운 살아있는 작품이다.

산책을 하고 와 정원 비취파라솔 밑에 아침 식사를 들고 나온다, “이제부터 식사도 여왕처럼 여유롭게 즐깁시다.”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며 명월초, 정원에서 따온 무화과, 와송으로 소박한 건강 식단을 차려 님과 마주 앉는다. 행복하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식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을 통해 우주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 음식이 우주로부터 온 선물임을 깨닫는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햇빛과 구름, 대지, 모든 것들과 대화할 수 있다.” 틱낫한이 쓴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그 책의 한 구절이 이 순간의 행복을 설명해준다. 함께 했던 선생님들이 이 날 이 시간을 생각해 퇴임 축하 문자로 행복을 보태준다. “서운하시죠?”하는 안부에는 공감이 안 된다. “가지 마세요.” 하며 손에 매달려 떼쓰던 아이들을 못 보니 그게 좀 서운하긴 하지만…. 41년 넘도록 재미있게 학교놀이 했으니 그만하면 족하다. 늙어서 퇴출당한 것이 아니라 여유를 즐기라고 밀어 보내는 정년퇴임이라 여기니 은총이다. “오늘의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데리고 온 곳에 있다.” 는 제임스 앨런의 말처럼 행복하다는 생각만으로 행복하고 싶다. 퇴임 선물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책을 사서 첫 장에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시길 기원 드립니다.”고 적어 주던 영아 선생님의 재치가 행복을 더해준다. POP 글씨를 배우는 중이라며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글씨도 수첩만한 액자에 적어 보내는 그 마음 씀씀이가 깊어서 사람 향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다. 이렇듯, 베나의 집에서 2년 동안, 내 손으로 섬김 밥상을 차려주었던 510명! 그들 중 누군가가 가끔 안부 문자라도 보내주거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겠다.

아침 먹고 돌아서 텃밭 채소를 추수하며 자연의 신비를 즐기다 보니 12시다. 누가 내 시간을 훔쳐가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만 같다. 점심도 건너뛰고 야간제 강의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부터 시간 강사로 나갈 대학원 교재 준비며 나눠 줄 책 선물, 개강 파티 할 준비까지 챙겨 부랴부랴 강의실로 갔다. 고등학교 사서교사, 유치원 교사, 6학년 담임교사, 중년의 남교사, 다양한 조합의 선생님들이 구성원이다. 와! 이렇게 젊은 현직 선생님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다니 이 또한 축복이다. 그리고 이번 학기 수업은 조금 더 폭 넓은 토의식 수업이 될 것 같다. 첫 만남이지만 개강 파티를 유치하게 하고 싶어 왕관을 준비해갔는데 모두 거부 반응 없이 머리에 썼다. 개강 축하 케이크를 함께 자르며 마음을 터놓았다. 그 중에서도 세종대왕 해례본을 현장에서 연구하기 위해 십년 넘게 1학년을 가르치며 장기간 프로젝트로 혼자 연구하고 있다는 중견 남선생님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 없다. 그런데 나이 많다고 일학년 담임을 줄 수 없다고 하더라는 말에 내가 부끄러웠다. 나이 많은 선생님의 노하우와 아이들에 대한 열정을 헤아려볼 줄 모르는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면 그들의 편견을 설득시킬 재간이 없어 나도 그런 점을 피해가며 학교 행정을 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학부모들이 싫어하는 늙은이다보니 내 처지에서 더 할 말이 없다. 그런 학부모들을 만나면 그저 슬퍼질 뿐. 나도 아이들 키울 때는 젊은 학부모였지. 문득, 아들 생각이 나서 카톡을 날렸다.

“아들아, 엄마는 오늘 교대 대학원생들과 첫 개강식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하던 축하 이벤트를 대학원에서도 했는데 모두 왕관 쓰고 함께 즐겼다. 엄마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젊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아들이 빠른 답 문자를 보내왔다. “얼마 전에 인천 상륙 작전 영화 봤는데요. 어머니에게 어울리는 맥아더 장군의 명언이 있었어요. ‘늙고 젊은 것은 그 사람의 신념이 늙었느냐 젊었느냐 하는데 있다’고요.”

그래, 새로 출발하는 행복 인생 출범식이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 베나의 집에 좋은 벗들 초대해 사랑 나누며 빛나게 살아야지. 매 순간이 황금기요. 행복한 순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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