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를 싼 후, 배우는 것들
보따리를 싼 후, 배우는 것들
  • 승인 2016.09.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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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문현숙
수필가
손가방은 여성이 하인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자기 소지품을 들고 자유롭게 외출하는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숄더백이 등장하거나 한 것도 여성이 정장을 입었을 때, 두 손을 자유롭게 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당시로 봐서는 ‘파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보따리’는 어떻게 그 어떤 시도보다 여성성을 대변하는 용어로 자리하고 있다.

‘보따리를 싼다’는 건 현재의 삶을 바꾸고 싶었던 여성의 강한 열망을 반영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거나 변화에 대한 동경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차(車)’에 강하고 여자는 ‘보따리(가방)’에 집착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십 수 년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싸고, 풀던 보따리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시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셨다. 구십일 년 만에 이룬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이었다. 어머님을 묻고 내려온 후 나는 ‘보따리’가 아닌 ‘가방’을 싸기로 했다, 남편과 자식, 내가 가진 모든 욕망들로부터 다 벗어나 딱 나 하나만, 보따리 속에 챙겨 넣고 단 며칠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가출’이 아니라 수도승이 ‘출가’를 하던 마음이었다.

흔히 여자들이 ‘가출’을 시도하느라고 싸는 ‘가방’은 커지기만 한다. 반대로 속세를 떠나는 ‘출가’를 위한 가방은 점점 작아진다. 남자들은 있는 자리만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겠지만 여자들이 ‘보따리를 싼다’는 것은 며칠을 고민해야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사람들은 내 가방 속을 무척 궁금해 한다. 하지만 나의 가방은 모두 노트와 책으로 채워져 있다. 가끔 내 노트를 훔쳐보는 사람들은 빽빽하게 적힌 ‘손글’에 놀라기도 한다.

‘여성성’을 상징하는 가방에 책과 노트뿐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내 가방 속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보따리’ 아니 ‘가방’을 싸야하는 일이 생겼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노래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처럼 지난여름의 폭염은 참으로 위대했다. 힘겹고 뜨거웠던 만큼 가을의 문 앞을 서성이는 바람이 신의 전령처럼 신선하고 애틋하게 불어오자 나는 가방 앞에 앉았다.

가방 속은 삶의 내용을 은유한다. 나는 며칠 얻은 일탈을 즐기기 위해 ‘보따리’가 아닌 ‘가방’을 싸기로 한 것이다.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다보니 ‘가방을 싸고 푸는 과정’이야말로 수많은 사연을 담게 되는 삶의 서사가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은 ‘가방’에 어떤 내용물을 넣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챙기고 싶은 것은 일기장과 글을 쓰면서 사들인 시집이며 책들뿐이었다.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만 가방 속을 채우며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안다면 저 많은 가재도구며 옷가지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고 넘치는 것의 부질없음을 나는 가방을 싸며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삶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내일을 기대하고 산다.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만은 피해갈 것이라 생각하며 어리석게도 요행을 바라고 산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데 게을렀고, 미안하다 말 한마디 건네는 일에 인색했다.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의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주는 일에도 게을렀던 것만 같아 후회가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진 것에 만족과 감사함을 느끼기보다 더 가지지 못한 것들로 인해 불만을 토로 할 때가 더 많았다. ‘보따리’를 싸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한 채 살았다.

가방에 잔뜩 책만 싸 짊어지고 갔던 여행길, 남들은 어떻게 여행길에 책만 갖고 갔느냐며 힐난하겠지만 나의 소박한 욕심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책 속 세상처럼 갇혀 있지 않았다. 또 다른 세상으로 펼쳐진 풍경과 색다른 향기들 그리고 다양한 컬러를 가진 사람들로 한껏 펼쳐져 있었다. 낯설지만 너무나 푸근했던 내 눈앞의 모든 풍경이 내 생애 최고를 장식하는데 충분했다.

나는 처음 ‘보따리’나 ‘가방’을 싸지 않고도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만 같았다. 이번 여름 나는 ‘보따리’나 ‘가방’을 버리고 한 아름의 ‘행복 보따리’를 마음에 받아서 온 것이다. 그래서 나의 ‘가방’은 좀 더 풍성해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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