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에서 이 편안으로
이 풍진에서 이 편안으로
  • 승인 2016.09.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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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락
前 대구시 중구청 공무원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어릴 적부터 흥얼흥얼 따라 부르곤 했다. 곡조도 쉽거니와 노랫말에 희망과 부귀영화가 나오고 족하다는 말까지 등장하니 얼른 들어서는 풍요한 세상을 구가하는 듯싶었다. 풍자하는 세상사에 삶의 무게를 더 해 가슴을 뜨겁게 하는 민족의 노래 같기도 했다. 그런데 1930년대 유행한 대중가요로서 제목은 ‘희망가’이지만 우울하고 비탄적인 분위기라 외려 ‘절망가’에 가깝다는 별명이 붙은 건 최근에라야 알았다.

세상만사 꿈같은 것일지언정 포기하지 말고 부디 희망을 품으라는 뜻일 게다. 기실 사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으며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또 없지 않은가. 세상 어디에도 항상 부귀영화만 누리고 만족하며 산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리라. 그나마 우리 민족은 예부터 창의적인 두뇌에 악착같은 끈기와 인내로 이 만큼의 부를 이루어 냈음에도 아직 피부에 닿지 않는다고 아우성들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 9시쯤이면 습관처럼 창밖을 내다본다. 철저하게 차량통제막이 설치된 이 아파트엔 번호 인식이 된 차량만 통과할 수 있다. 입구엔 붉은 전등불이 24시간 요란하게 번득이고 정복을 입은 경비원이 준엄하게 지키고 있다. 하여 뭔가 보호받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들기도 한다.

방금 딸을 노란색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고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걸 바라보던 어머니가 이젠 작은아들을 태운 유모차를 끌고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로 향한다. 하나둘 모여드는 공간, 이제 어머니와 아이들이 텅 빈 아파트를 차지할 때가 됐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행복을 먹고 산다.

두 달 전 경산으로 이사를 왔다. 퇴직 후 느지막이 아침 식사를 하고 아파트 밖을 내다보는 풍광이 그러하여 한결 여유로움을 느낀다. 처음에 ‘이편한 세상’이란 호칭에 끌려 이 집을 택했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귀한가. 세상 그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고운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그만큼 세파에 찌들었다고 해야 할까, 자꾸 인구가 줄어드니 아이들의 소중함이 더욱 크다. 그래 위층에서 쿠당탕대도 참으며 산다. 감히 하나뿐인 귀한 자식이 노시는데 방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괜히 말을 꺼냈다가 “내가 아이를 낳고 싶어 나은 줄 아세요, 국가의 존립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걸요” 부모가 그런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처음 이사 와서는 적응이 잘 안 되었다. 쓸데없이 전기장치를 세분화해놓아 헷갈리게 함은 물론 구조도 어색하여 낯선 집을 찾은 것 같았다. 느닷없이 짜증이 났다가도 이내 기죽고 만다. 내가 현시대에 잘 적응을 못 하는 구시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이건 생존의 문제요 삶의 질과도 연관 된 것, 뛰어넘어야 했다. 각고면려의 결과일까, 이제 기기 작동이 한결 수월하고 간간이 들리는 소음과 주차문제도 이해하게 된다. 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과도 곧잘 인사를 나누며 정을 쌓는다.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하다가 어려움에 당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여름 그악스럽게 울어대던 매미 울음도 점차 사라져 간다. 밤잠을 설치며 우리 선수들의 선전 모습을 지켜보던 리우 올림픽의 열정, 몇 차례 강풍과 홍수로 가슴 조이고 그 뜨겁던 더위도 울 넘은 호박가지처럼 아래로 숙진 다. 땀 흘려 가꾸었던 결과물들의 성적을 받아 쥐듯 긴장해야 할 시간도 머지않았다. 하지만, 산다는 건 종국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지라 퇴근 후 문에 들어서는 순간 후딱 넘어서야 한다. 이 풍진 세상이었다면 얼른 이 편한 세상으로 말이다.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또 내일을 위해 충전하는 곳이 바로 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저명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애가 탄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화려했던 한 시대를 저버리고 갔을까. 그간 이룩해 놓은 것도 많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은 분이다. 요즘 귀한 생명이 산속 고목처럼 쓰러져 가니 안타깝다. 복잡다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나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어릴 적 이 풍진 세상이 그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때가 행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편안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길들여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아침마다 별일이 없는 한, 저 창밖을 응시해야겠다. 그래 저 티 없는 미소와 사랑을 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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