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과 ‘3·5·10’
김영란법과 ‘3·5·10’
  • 승인 2016.09.1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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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
펄펄 끓던 폭염이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절기상 입추가 지난 지 한참이고 추석도 멀지 않은 탓이리라. 필자에게는 항상 이 무렵이면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라 해서 업무상 관련 있는 몇 곳에 성의를 표하면서도 사실은 너무 약소한 게 아닌가 하는 송구함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올해는 그 고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고민의 해결사는 엉뚱하게도 세간에 그렇게 말이 많은 김영란법(공식 명칭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지금 시중에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내용은 직무관련자와 식사하거나 선물을 하고 경조사비를 낼 때 허용되는 금액의 상한에 관해서이다. 말인즉슨 식사는 3만원 이하, 선물은 5만원 이하, 경조사비는 10만원 이하일 경우에만 괜찮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경제계와 특정 산업분야 관련자들은 그 상한을 올려야한다고 주장해서 논란이 되어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얼마 전 정부는 기준을 상향시키지 않고 당초의 원안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형편이 별로 나아질 게 없는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형편이 좋아서든 관련 업계의 현실을 고려해서든 금액기준을 올리기를 희망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차제에 필자 같은 이들의 우스운 고민을 해결해 준 정부의 결정에 환영의 박수를 보낸다.

이 문제의 사회적 해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야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우리의 정신자세 내지 마음가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은 사회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을 가리킨다. 첫째, 정신자세와 관련해서는 이제 좀 체면을 가장한 보험들기에서 벗어나자는 말이다. 값비싼 식사와 선물, 고액의 경조사비를 주고받는 관계라야만 상호간 업무가 잘 되어 왔다고 믿고 있거나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제 김영란법은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증표 내지 면책권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법이 애초부터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싶은 모든 국민들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마음가짐과 관련해서 함께 필요한 것은 비용의 공공성에 대한 냉철한 자각이다. 김영란법이 규율하고자 하는 영역은 순수하게 개인이 자기 돈을 지출하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기업체나 단체 차원에서 업무추진 명목으로 공적인 비용을 지출하는 경우이다. 사실 말이 3만원, 5만원, 10만원이지 사적 영역에서 지갑이 두둑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갑을 열 때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금액 수준이기도 하다. ‘내 돈이 아니니까’ 혹은 ‘눈 먼 돈’이라는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할 것이다.

둘째, 김영란법과 관련한 사회구조와 경제시스템의 정비도 시급하다. 마음이 바뀌지 못하는 것은 값비싼 식사와 선물, 고액의 경조사비용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와 경제적 시스템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서는 공적인 비용으로 이런 고비용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경제 현실을 타파하는 한편 개인소득을 증가시켜 순수한 목적의 사적 소비를 진작시키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쉬운 예로 회사에서 법인 카드 갖고 나와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밥 먹고 선물주고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용을 피고용인의 소득으로 바꿔주어서 아빠 또는 엄마가 부모님, 자식, 친구와 함께 즐겁게 식사하고 의미 있는 선물을 사주는 상황으로 바꾸어야한다. 그래야만 일시적이고 일부이긴 할 것이지만 피해를 주장하는 영역이 만회할 여지가 생긴다.

필자는 아주 오래전에 북구의 핀란드에서 약 2년간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알게 된 격언이 지금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공무원들에게는 따뜻한 맥주와 찬 샌드위치가 어울리고 그 반대가 되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귀국을 앞둔 어느 겨울날 알고 지내던 교수님과 식사를 한 후 필자가 계산을 하려고 하자 (왜 자신의 비용을 대신 내주려하는지 의아해서) 몹시 난감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청렴과 반부패는 하나의 문화이다. 잘 뿌리를 내리면 매년 세계 투명성 지수 1위를 다투는 핀란드처럼 새로운 문화가 나올 것이고 거기에서 새로운 생활양식이 발달할 것이다. 김영란법과 3만원, 5만원, 10만원! 이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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