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산다
비워야 산다
  • 승인 2017.01.3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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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 사람향기 라이프 디자인연구소장
겨울이 되면 떠오르는 추억 중 그리운 장면이 몇 있다. 먼저 찬바람 부는 날 학교 앞 문방구점 연탄위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오뎅이 생각난다. 비장하게 가슴에 긴 대살 하나씩 꼽고 우리를 유혹했다. 빨간 플라스틱 간장 그릇에 담긴 호호 불어 마시던 뜨끈한 오뎅 국물, 김이 나는 하얀 찐빵, 아침 등굣길 하얗게 서리 덮어쓴 마른 나뭇가지, 그리고 고드름, 하얀 눈.

눈이 오고, 눈이 녹기 시작하면 지붕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자랐다. 누구 집 고드름이 더 크더라 하던 것은 그 당시 우리들에겐 큰 이야기 거리였다. 어쩌다 우리 집 지붕으로 큰 고드름이 자라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깨가 귀까지 올라가기도 했었다.

또 하나 겨울이면 항상 떠오르는 건 선녀님들이 뿌려주던 하얀 눈꽃송이다. 눈 소식은 새벽에 마당에 나갔다가 찬바람 몰고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었다. “밖에 함 봐라. 눈 왔다“ 그 말에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반사적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하얀 세상. 세상모든 것이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 쓴듯하다. 마당에도, 담장위에도 앞집 감나무에도, 지붕위에도 지붕 너머 대나무밭에도 눈을 뒤집어쓰고 휘어져있다. 눈(雪)은 부끄럼이 참 많은 것 같다. 꼭 우리가 잠자는 새벽시간에 몰래 내렸던 걸 보면 말이다.

필자는 얼마 전 일본 요코하마에 살고계신 지인의 집에 묵으며 10일간 일본을 체험하고 왔다. 그중 2박3일의 아키타 현(秋田?)에서의 눈 여행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평생 볼 눈을 다 보았다.”얘기 할 정도로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당시 일본 현지 TV뉴스에서도 아키타현과 아오모리 현에 내린 눈은 몇 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연일 방송될 정도였다.

아키타현의 집 지붕들은 한국과는 조금 다르게 높게 하늘로 치솟은 형태가 많았다. 그 이유인 즉, 눈이 지붕위에 많이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내리는 눈송이 하나는 만져보면 솜털처럼 가볍다. 그런 가벼운 눈이 쌓여봤자 얼마나 무겁겠냐 싶지만 눈이 많이 쌓이면 집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한다. 난 그저 지붕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하얀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현지의 사람들은 겨울이면 눈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큰돈을 들여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열선(熱線)을 추가로 설치하는 집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지붕에 쌓인 눈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생각에 잠긴다는 건 필자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다. 잠긴 깊이만큼 현상에 집중할 수 있고, 다시 표면으로 떠오를 때는 그 현상에서 무엇 하나 들고 떠오를 수 있으니깐. 이번에도 역시 생각하나 건져 올라왔다. 비워야 산다는 생각하나.

눈은 내릴 때도 예쁘지만 소복하게 쌓이면 더 보기 좋다. 눈의 쌓임의 정도가 얇은 것보다는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 쓴 것처럼 수북하게 쌓였을 때가 훨씬 멋스럽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여야 한다. 계속 눈이 지붕에 쌓이면 안 된다. 어느 정도까지만 멋스럽게 쌓여주고 나머지 것은 바닥으로 흘러 내려줘야 한다. 그래야 눈(雪)은 눈대로 멋스럽고 집은 집대로 안전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간다면 끝내는 지붕이 무너져 내려 큰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 쌓여가는 눈을 지붕위에 오래 이고 있으면 안 되듯 우리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가벼운 고민거리라도 머릿속에 오래 간직하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찾아든다. 잠시 잠깐은 별 문제 없지만 시간이 지나 그 생각이 쌓이고 쌓이면 큰 데미지(damage)를 줄 수 있다.

그리움도 오래 되면 병이 된다. 해결 못한 욕구도 오래되면 병이 된다. 흘려버릴 수 있을 때 건강하다. 음식물도 몸속에서 흘려보내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간다. 먹었다면 비워야 한다. 그게 정상이고 그게 순리다. 그렇지 않고 계속 채우기만 한다면 우리 몸은 여러 가지 문제로 고생할 지도 모른다.

잘 비워야한다. 움켜쥔 손에 더 이상 잡을 수 있는 건 없고 비우지 않으면 다시 채울 수도 없다. 한 번씩 조용한 곳에서 자신과 독대하며 비울 건 비우고 살아보자.

단, 비우려면 먼저 채워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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