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를 위한 변명
할배를 위한 변명
  • 승인 2017.02.0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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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미 대구여성의전화 대표
그는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아파트 아래로 뛰어 내렸다. 박사모로 알려진 그가 투신할 당시 들고 있던 태극기에는 ‘탄핵가결 헌재무효’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박사모활동으로 인해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족 간의 갈등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는지,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죽음으로 탄핵반대를 알리고 싶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살이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극단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세상에 대한 분노이거나 수동적 공격일 수 있다면 과연 그가 가진 분노가 진정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시스템을 참담하게 망가트리면서 참고 참았던 국민의 분노가 탄핵정국을 만들었고, 탄핵 반대로 이득을 볼 세력들은 국민들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아닌 일부 재벌이나 권력자들과 그 부당한 세력에 충성하는 이른바 부역자들이기 때문이다. 부패한 정경유착과 초법적 권력남용으로 사회정의는 실종되고, 나날이 어려워지는 나라살림에 서민과 노약자들을 위한 복지가 축소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국민에게 돌아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자신의 계층적 이익 뿐 만 아니라 자손들의 미래희망까지 암울하게 만드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묻지마 집착’의 기저에 깔린 분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위해 탄핵반대를 외쳤을까.

‘유한계급론’의 저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이자 아웃사이더로서 미국사회를 관찰하던 중 어떤 흥미로운 현상에 주목했다. “왜 가난한 이들이 보수적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온 현상이 그것이다. 베블런에 의하면 자본가 계급을 포함해서 생산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여가(leisure)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유한계급’이라고 한다. 이들은 돈과 권력을 독점하여 세상변화에 큰 압력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을 변화 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므로 기존의 제도와 생활양식을 선호하는 ‘보수주의’의 경향이 강하다.

한편,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가난한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현제도와 생활양식 속에서 많은 고통을 받기 때문에 현실의 변화를 원하는 ‘진보주의’의 성향을 가지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일상의 생존만으로도 너무나 힘겨운 가난한 사람들이 변화(진보)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생활양식의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위소득계층이 기본적인 생활에 적응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 버림으로써 기존 방식에 순응하는 ‘보수주의’의 성향을 띄게 된다고 베블런은 주장했다.

베블런이 이처럼 사회모순을 지적한 지 100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자기계층의 이익에 반하는 행보를 보이는 현상을 노년층에게서 많이 목도하게 된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제도가 생활수단에 해당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을 하층계급으로부터 박탈함으로써 그들의 소비를 줄이고, 그 결과 그들의 에너지를 소진시켜 학습은 물론 새로운 사유 습성 채택에 필요한 노력을 할 수 없는 지점으로 이들을 몰아 결국 보수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노년층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된 세대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 낸 세대에게 반공이데올로기는 통치자에게 가장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을 것이다.

험난한 현대사를 온 힘을 다해 살아내었지만 가부장의 지위는 약화되고 꼰대와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는 노인세대의 울분을 사회 어디에서도 위로해 주는 곳이 없다. 힘을 잃어가는 세대에게 그 시대를 함께 했던 독재자는 절대자가 되고 절대자는 대한민국과 동일시 된다.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해석할 여력이 없는 그들에게 함께 국가가 된 그의 딸을 태극기로 지키는 것이 애국이 된 듯하다. 시국반대집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아래 목청을 높이는 어르신들을 보며 한없이 착찹하고 슬픈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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