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밥값
  • 승인 2017.12.1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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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12월의 저녁처럼 세심하게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은 달이다. 강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에서 질긴 생명력을 본다. 창고 뒤에 웅크리고 있는 보일러는 기름이 바닥이다.

전국에 걸쳐 기온이 영하 12도 안팎으로 떨어지며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예보가 TV 화면을 통해 흘러나온다.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보일러 기름이 바닥이 났어요. 얼른 오셔서 기름을 가득 채워 주세요.”

12월은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이다. 넉넉한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느긋하게 다음 계절을 준비할 수 있지만, 도시 생활자들에게 월동준비란 늘 코앞에 닥쳐야 실감할 수 있는 연례행사다.

어릴 적 어머니는 주머니가 텅 비워져 있으면 먹고 싶은 것도 더 많아 지는 법이라며 늘 손이 큰 나를 타박하셨다. 음식이든 뭐든 남에게 퍼 주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는 아버지를 닮아 헤프다며 가난한 사람에겐 여름보다 겨울나기가 더 힘들고 고단한 일이니 알뜰살뜰 아끼며 살라 하셨다. 그리고 늘 겨울이면 창고에 가득 쌀이며 연탄을 채우는 것으로 월동 준비를 하시곤 했다.

보일러에 기름을 가득 채운 후, 기사님이 말을 건네 온다. “요즘 들어 더욱 먹고 살기가 힘들어 졌다”며 울상이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나를 보고 큰소리로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다.

“기름보일러 대신 도시가스로 모두 바꿨잖아요.” “어머나, 그럼 길냥이들은 어떻게 살아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길냥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 식탁 밑에는 밥그릇이 세 개 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또 두 개의 밥그릇이 있다. 내가 고양이들을 위해 챙겨야 하는 밥그릇은 총 다섯 개가 되는 셈이다.

집안에 있는 고양이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키우게 됐지만, 사람에 비해 수명이 짧아 벌써부터 그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견뎌야 할 지 가슴이 먹먹해 지기도 한다.

문제는 동네근처를 배회하는 길냥이었다. 도시의 길냥이들은 먹이 사냥이 거의 불가능한 척박한 현실에 처해 있기 때문에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길냥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신장이 망가지는 비뇨기질환인 신부전에 걸리지 않으려면 물을 먹어야 하는데 도시에는 그 흔한 물 한 방울조차 먹을 곳이 없다.

처음 몇 날은 길냥이들의 눈빛을 외면했다. 누군가 한 번 그들의 밥을 챙기기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의 밥을 챙기는 일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길냥이들은 신기하게도 밥을 주는 시각에 맞춰 기다리고 있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정확히 말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난 캣맘이 되었다.

안과 밖 다섯의 고양이 밥값 앞에서 나는 매번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특히 밖에 있는 길냥이들의 밥을 살 때는 좀 더 싸고 좀 더 양이 많은 것으로 달라는 내가 부끄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이왕 책임지기로 한 것이니 끝까지, 오래 그들의 밥이나마 챙겨 줘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의 무게는 1그램 정도라고 한다. 이 초경량의 물방울이 누군가를 휘청거리게도 하고, 때론 감동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측은지심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냥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주지 않아도 누구도 나를 탓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작은 배려가 삶이 죽음으로, 죽음이 삶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숲도 사라지고 없는 도시에서 혹한이 밀려 든 겨울밤이면 길냥이들은 지하 보일러실에서 추위를 견디곤 한다. 그런데 가스보일러로 바뀌면 기름을 공급하는 기사의 생계가 힘들어지는 것만큼이나 길냥이들도 겨울나기가 무척 어려워 질 것이다. 이 겨울에 느끼는 체감 온도는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동일할 것이다. 비록 길냥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한 배고픔도 목마름도 추위도 느낄테니까.

오늘도 앞집 할머니가 담벼락 너머로 소리를 지른다. 쓸데없이 길고양이 밥을 챙겨 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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