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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물고기처럼

기사전송 2018-01-08, 2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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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수필가)


연하장을 선물처럼 받아든 새해, 화답을 보내기위해 집 앞 우체국을 찾았다. 우체국 한켠 구석진 자리에 자릴 잡고 앉은 그녀가 눈에 들어온다. 무엇인가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었다. 모양대로, 크기대로 분류한 뭉치마다 포스트잇에 설명을 적어 붙인 후 꽤나 큼지막한 상자 속을 채워 넣고 있었다. 어디로 보내는 것인지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물어 보진 않았다. 다만 내가 선물을 받아든 사람마냥 그녀 곁에서 덩달아 행복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고 쓴 청마 시인의 시처럼 어쩌면 받는 것보다 줄 때가 더 행복한 일이 아닐까 싶다.

우체국에서 제공해주는 새해 달력을 챙겨놓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계속 그녀의 분주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택배를 다 보낸 후,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직접 짠 참기름 한 병도 함께 보냈다며 가지런한 이가 보이도록 웃는다. 선물을 받는 분의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들뜬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남아 내 귀를 파고들었다.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하늘이 주신 선물인걸요.”

올해도 깨소금 볶듯 고소하게 잘 살라는 덕담까지 주고받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작은 선물의 전달이지만 받는 이에게는 사는 내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베를린의 한 공원에서 울고 있는 어떤 소녀를 만났다고 한다. 인형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던 소녀가 안쓰러웠던 카프카는 인형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고 말해 준다. 그는 소녀에게 자신을 인형의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라고 소개하고는 내일 이곳에 오면 인형의 편지를 전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 후 카프카는 한동안 인형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쓰기 시작한 서른 통의 편지는 인형이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 비록 내가 보내는 연하장 한 장이 소녀를 위로하던 카프카만큼의 정성은 아니지만 새해에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그 편지를 전하는 정성스런 맘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우체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근린공원 옆 재활용을 내어놓는 상자 앞에는 여러 가지 인형들이 나란히 앉아 새로운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버리면 쓰레기이겠지만 내 아이가 가지고 놀며 꿈을 키웠던 것처럼 인형은 또 다른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줄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형들 앞에 펼쳐진 하얀 도화지에 또박또박 적어놓은 글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 받을 준비가 다 되었어요.”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은 퍼내면 퍼낼수록 차고 넘치는 샘물이 되지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조금만 퍼내도 바닥을 드러내는 우물과 같을 것이다. 인도의 성자 까비르의 시편에는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 한다’는 시가 나온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시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는 것을 / 듣고 나는 웃는다. / 진리가 그대의 집 안에 있다는 것을 / 그대는 알지 못한다. / 그리고 그대는 숲에서 숲으로 / 기운 없이 방황한다. / 여기에 진리가 있다! /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보라, / 베나레스로 마투라로 / 그대의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 세상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까비르, 「천국으로 가는 시」中

카프카가 느끼는 절망의 원천은 그가 아끼던 친구들, 사랑한 여인들, 싫어한 직업, 살아간 사회 등이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존재와 그가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한 신과의 진정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고립돼 있는 의식에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곳, 이 곳이 천국이 됐다가 지옥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작은 정성의 선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받는 것보다 더 많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물속의 물고기처럼 늘 목이 마를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이다. 물속의 물고기처럼 힘차게 헤엄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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