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꿈
잠들지 않는 꿈
  • 승인 2018.04.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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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수필가)


“봄이면 가끔씩 사랑이 움트고 내 사랑의 꽃이 피어납니다 / 사랑이 언제나 푸르고 푸르다면 여름이 지나 겨울이 와도 싱그럽게 피어 있겠죠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

6시가 되면 89.7FM 라디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세상의 모든 음악’ 코너다. 늘 찾아서 듣는 방송이지만 수요일 저녁이면 새로운 느낌으로 스며온다. 어둠이 내리고 시골집 굴뚝에 피어오르던 저녁연기 같은 설렘이 있다.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 끝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던 전설 속 순애보의 주인공이 된다.

‘들마을’이란 의미로서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곳, 평리동에서 핸들을 잡는다. 두근대던 심장이 선율 따라 젖어든다. 신작로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 따라 겸손하게 길을 비켜선 채, 하늘을 받치고 서있는 플라타너스의 기립박수가 연이어진다. 가지 끝에 하나 둘 움트는 새싹들이 네온사인 불빛을 받으며 폭죽을 터트리듯 중년을 넘어선 내게 희망을 던진다. 늦지 않았다고.

박수소리가 잦아들 무렵 옛 대영학원 자리에 이른다. 인터넷 강의에 밀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곳이다. 학생들이 학원가를 번성케 했던 시절, 까까머리 친구들의 꿈을 향한 함성소리가 계대 대명동 캠퍼스로 이어진다. 우체국에서 대구의 우편 번호부를 펼쳐보면 가장 넓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동네가 대명동이다.

라디오 볼륨을 올리고 우회전을 하면 삼각로터리가 펼쳐진다. 배호 노래 속 그 장소는 아니지만, 지명 속에 묻어나는 아련한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듯 애잔함을 옆 좌석에 앉히고 그대로 직진이다. 지나간 추억들이 드문드문 나타날 즈음 처음으로 유턴이다. 자동차 백미러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낯설다. 방금 지나온 길이건만 내 인생 어느 한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유턴을 해볼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학교 후문에 들어서면 사진 한 컷 ‘찰칵’ 출석부에 도장을 찍듯 빛이 난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무거웠던 상념들을 내려놓는 순간 물오른 초록세상이 버선발로 가슴팍에 뛰어든다. 저마다의 개성 따라 희망을 노래하며 축복의 메시지로 나를 맞는다. 나무들의 향연으로 감탄사가 끝날 즈음 정문에 다다르면 다시 한 번 ‘찰칵’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 인화되어 나온다. 기분은 맑아지고 열정지수는 한껏 부풀어 오른다. ‘늦깎이’가 새겨진 이름표를 가슴에 단다.

3층 계단을 오르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실로폰 음을 낸다. 커다란 빅빽을 어깨에 두르고 두어 권의 책들을 가슴에다 안았다.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청순하게 차려입은 여대생의 모습은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추억처럼 젖어든다. 강의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문을 연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던 교시의 처방전을 받아든다. 단 한순간도 허투루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야지. 그리고 보이지 않게 스스로를 녹이며 말없이 도와주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지. 자주 만나진 못해도 이곳에선 나이와 지위, 학력 모두 내려놓음으로 꿈을 향해 달려가는 동반자며 같은 반 친구가 된다.

하나를 알면 오히려 열을 까먹는 나이에도 빛이 바래지 않은 열정이 신록처럼 푸르다. 고통 뒤에 오는 성숙함을 맛보고 싶다. 마음만은 풋풋한 18세가 되어 모락모락 김나는 찐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사랑과 우정이 조화를 이루며 배우면서 힐링이 되는 곳 405호에서 꿈을 향한 도전장을 당차게 던진다. 봄이여, 우리들 잎사귀를 우럭우럭 키우게 하고 붉고 희게 꽃 피우게 해다오.

“다들 잔을 높이 들고 눈부신 비상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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