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과 5·18항쟁의 영혼결혼 부부
4·19혁명과 5·18항쟁의 영혼결혼 부부
  • 승인 2016.06.0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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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객원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이승에서 인연을 맺지 못했던 처녀 총각이 각기 세상을 하직한 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영혼이나마 혼인의 가약을 맺어주는 일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간혹 있다. 이미 죽은 사람끼리의 결혼이지만 양가의 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 살아생전에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애인끼리 동반 자살한 경우에도 영혼이라도 맺어줘야 한다는 참담한 후회 끝에 영혼결혼이 이뤄지는 수도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한다. 종교적으로는 한 쪽만 죽었는데 살아있는 사람과의 영혼결혼을 하는 수도 있어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영혼결혼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으면 쉽게 성사하기 어렵다. 더구나 고인들이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과연 양가의 부모들만이 동의하는 결혼이 타당한 것인지 여부를 따진다면 쉬운 일이 아님을 금세 알게 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못다 핀 한을 풀어주려는 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영혼결혼이 이뤄진 부부들은 그나마 귀신이라도 흐뭇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4·19혁명과 5·18민주항쟁에서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독재정권의 희생자가 되었던 두 쌍의 영혼결혼 부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어 현충일 아침에 이를 일깨워주고 싶은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은 금년으로 56주년을 맞이했고 1980년 궐기한 5·18항쟁은 36년이 흘렀다. 20년 터울로 일어난 양대 혁명은 이 나라 민주발전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경찰과 군인들이 쏜 총탄세례를 받고 각기 200명에 가까운 생령이 희생되었다. 수천 명의 부상자 중에는 지금도 기신(起身)을 하지 못하는 중상자도 여럿이다.

이승만이 12년 동안의 장기집권도 모자라 영구집권을 위해서 3·15부정선거를 강행했을 때 전국의 학생들이 궐기했다. 처음에는 2·28대구 고등학생들이 일어났고 마산에서 3·15의거가 터졌다. 전북대에서는 4·4의거를 감행했고 고려대 4·18의거는 정치깡패의 습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국에서 일제히 4·19혁명의 불꽃이 타오르며 4·25교수데모까지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 때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대학이 중앙대다. 무려 6명의 학생이 생목숨을 잃었다. 금년으로 개교100주년을 맞이하는 중앙대는 많은 기념행사 중에서도 4·19혁명열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아끼지 않는다. 가장 부각되는 행사의 하나가 당시 약학과 3학년이었던 김태년군과 법학과 2학년 서현무양의 영혼결혼부부에 대한 추념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4·19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양가에서는 4·19가 있던 해 11월11일 조계사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충북 음성 선영에 합장하여 명실 공히 부부로 탄생했다. 33년이 지난 후 1993년 4·19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했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수유리묘소에 이장할 수 있었으나 각자 유공자여서 따로 묻히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체신공무원으로 일가를 이룬 동문 김정일은 만사제폐하고 합장에 앞장섰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드디어 1995년 11월9일 한 봉분아래 부부합장이 성사되었다. 그는 그 뒤에도 사호선문학동우회를 만들어 김경희 류연경 임정순등과 함께 영혼결혼부부를 기리는 문학 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한다.

5·18항쟁과 관련하여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행사 닷새 전날 청와대는 3당 원내대표를 초청하여 화기애애한 회담을 가졌다. 기념곡으로 제창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야당 측의 제안에 “찬반은 있지만 5·18행사정신이 국민을 통합해야 하는 것”이라며 “국론분열로 이어지면 문제가 있으니 국가보훈처에 지시하여 좋은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을 받았으나 국가보훈처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보훈처장은 행사장에 입장도 못하고 쫓겨났다.

대통령의 지시가 무시되는 기강해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노래는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항쟁하다가 피살된 윤상원과 노동운동을 하다가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노래극에 삽입했던 곡이다. 이 곡이 북한에서 제작된 ‘임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의 배경음악이 되었으며 여기서 쓰인 ‘임’은 김일성이기에 결국 김일성 찬양노래라는 것이 보수우익세력의 주장이며 이를 국가보훈처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엉뚱하다. 김일성은 1994년에 사망했고 이 노래가 나온 것은 그보다 14년이나 빠르다. 하등 관계가 없다. 더구나 1997년에 5·18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가 되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반드시 참석한다. 13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참석자 전원이 함께 부르는 제창(齊唱)이 되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2009년 이명박정권에서 이를 공식순서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5·18단체와 시민단체들은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따로 기념행사를 치렀다.

대통령이 가장 염려하는 국론분열은 5·18의 기본이념과 아무 상관없이 오직 국가보훈처의 막무가내 식 독단에 기인한다. 영혼부부가 된 윤상원과 박기순은 어처구니없는 이 현상을 바라보며 뭐라고 하겠는가. 4·19혁명과 5·18항쟁의 희생자인 두 쌍의 영혼부부는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국론분열에 통곡을 멈추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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