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짊을 타고 난 사람, 체득한 사람, 빌려 쓴 사람
어짊을 타고 난 사람, 체득한 사람, 빌려 쓴 사람
  • 승인 2016.07.1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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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전중리초등학교장
집 안의 집기나 가전제품들이 오래되어 고장이 잦거나 불편하여 새로운 것으로 자주 교체하곤 한다. 며칠 전 김치 냉장고를 새로 구입하였다. 부피도 크고 기능도 많이 좋아진 것을 사면서 ‘그 큼직한 공간과 많은 기능 다 활용할 수 있을까?’하고 나름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평소 모든 일에 데면데면하다. 지금까지 전자제품이나 전자기기의 성능을 최대한 활용한 적이 없다. 그저 켜거나 끄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거나 불편하지 않으면 그냥 사용하였다. 그래서 물건의 구입 시 의견을 진술하는 논변에선 항상 밀리기 일쑤이다. 대개 비유를 통하여 설득하거나 교훈적인 성격이 강한 논변의 글을 ‘~설(說)“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가정 이곡이 쓴 수필형식의 ‘차마설’에는 말을 빌려 타는 이야기가 나온다. 집이 가난하여 가끔 말을 빌릴 때 여위고 둔하여 느린 말은 아무리 바빠도 감히 채찍질을 하지 못하여 조심조심하며 가다가 구렁을 만나면 내려서 말을 몰고 가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적다고 하였다.

반대로 준마를 빌리면 달리는 기분이 장쾌하기는 하지만 혹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관계로 근심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곡은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 아침 소용에 대비하는 것도 이와 같거든, 하물며 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랴.’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임금은 백성에게 힘을 빌리고, 신하는 임금에게 권세를 빌리고, 자식은 부모에게서 타고난 재능을 빌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맹자의 ‘남의 것을 오랫동안 빌려 쓰고 있으면서 돌려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을 알겠는가?’를 인용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요임금과 순임금은 어짊(仁)을 본성으로 타고 났다. 그리고 상(은)나라를 세운 탕왕과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어짊(仁)을 체득하였던 것이다. 또 오패는 어짊(仁)을 빌렸던 것이다. 오패는 춘추시대 다섯 사람의 패자를 말한다. 제나라의 환공, 진(晉)나라의 문공, 진(秦)나라의 목공, 송나라의 양공, 초나라의 장왕을 일컫는다.

맹자는 이 춘추 오패가 ‘어짊(仁)을 오래도록 빌리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久假而不歸 惡知其非有也)’고 반문하였던 것이다. 맹자의 평소 생각은 원래 무력으로 어진 정치를 가장하는 사람은 제후의 우두머리라 하였던 것이다. 오패를 별로 탐탁찮게 생각하였다.

춘추 오패가 어짊을 빌린 것에 대하여 학자들의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어짊(仁)을 너무 오래 빌려 가지고 있어서 자기 것처럼 하여 남을 속이는 짓을 하면 자기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의 부정적 견해다. 남의 것을 가지고 제 것 인양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요즘 재물이든 권력이든 집착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흙으로 돌아갈 적에 빈손으로 간다. 부자들의 대부분이 매일 돈을 허공에 뿌린다고 해도 다 못 뿌리고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 가운데는 가장 정직한 관리로 모범의 전형이었던 사람도 많다. 그런데 퇴직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어마어마한 갑부가 된 경우가 허다하다. 실로 놀랍다. 표리부동에 괴리가 생긴다.

한편으론 어짊(仁)도 오래 빌려 가지고 있으면 제 것이나 다름없이 된다. 오패들은 그것을 오래 빌려 가지지를 않았다는 것을 애석히 여기는 마음이다.

춘추 오패들은 가끔씩은 어짊(仁)에 대하여 말하기는 하지만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오래 빌려 가지고 있으면 자기 몸에 배어서 성지(性之)할 수도 있고, 신지(身之)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성지하는 것은 어짊을 본성대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신지하는 것은 어짊을 힘써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이곡의 말처럼 적게 가지면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고 안빈낙도할 수 있다. 높은 권세와 재물을 가지면 위태로워 근심거리가 많을 것이다. 근심하는 일보다는 느리지만 조심조심하며 후회하는 일이 없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어짊을 타고난 사람, 어짊을 체험한 사람, 어짊을 빌려 쓴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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