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의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유사의 할 일은 따로 있었다
  • 승인 2016.08.0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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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전 중리초등학교장
날씨가 무더워 오랜만에 잔치국수를 해서 먹자고 하였다. 잔치국수는 먹는 사람은 시원하고 훌훌 잘 넘어갈 런지 모르지만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게 힘들고 잔손이 많이 가는 일인 모양이다.

나는 음식에 관한 한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직접 해본 경험도 적다. 어릴 때부터 고루한 집안에서 자란 까닭에 부엌에 드나드는 것조차 아직도 어색하다. 가끔 집에서 끼니를 혼자 해결해야 할 경우 요즘도 많은 불편을 느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자업자득인 셈이다.

시간이 지나고 국수가 다되었다고 하는 소리에 식탁으로 갔다. 국수에 여러 가지 색색고명이 얹혀 있어서 정말 맛있게 보였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식탁에 앉았는데 내 자리에 숟가락은 있고 젓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젓가락이 없다고 하자 아내는 벌떡 일어나 “어머, 젓가락을 놓지 않았네!”하며 갖다 주었다.

‘내가 얼른 일어나 챙겨도 되는데….’하는 면구스러움이 생겼다.

어릴 적 시골에 잔치집이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가 한 사람 있었다. 동네 큰일엔 빠지지 않는 전문 유사라 할 친척이 있었다. 바로 옆집아재였다. 큰일이 있으면 시골동네에서는 항상 앞장섰고 성심을 다해 일하는 까닭에 뽑혀 다녔다.

옆집아재는 특히 손님의 음식상을 감시 감독하는데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동네에 장만해 놓은 공동 집기부터 상에 놓이는 음식까지 일일이 챙겼다. 자연스레 말이 많아지고 간섭이 많은 잔소리를 하는 일종의 좋은 잔소리꾼이었다.

잔칫상에 간장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수저는 반듯하게 놓였는지, 돼지고기의 양은 적당한지, 인절미며 절편은 제대로 놓였는지 등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만약 잔칫상에 한 가지라도 빠지면 “간장이 없네. 무슨 떡이 빠졌네. 돼지고기가 없네.”하고 일하는 사람에게 일일이 지적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이 바쁘든지 한가하든지 그 사람이 가져와서 챙기도록 하였다.

옆집아재는 빠진 물건을 직접 가져오거나 마련하여 챙기는 법은 절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더러는 가끔 옆집아재를 흉보기 시작하였다.

‘아재가 좀 갖다 놓거나 챙기면 일이 쉬울 텐데…. 조금만 도와줘도 되는데…. 과방에 가서 달라고 해서 진설하면 되는데….’하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옆집아재도 자신에 대한 풍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옆집아재는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묵묵히 하던 그대로 동네의 유사 일을 보곤 하였다. 입방아에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느 날 글공부를 왔던 동네 학동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옆집아재가 사랑방에 왔던 날 논어에 나오는 ‘유사(有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변두지사 칙유사존(則有司存)’의 내용이다.

변은 대나무 조각을 이리저리 서로 어긋매끼게 얽어 엮어 만든 과일을 담는 제기를 말한다. 즉 서너 되 가량 들어가는 대오리 소쿠리모양이다.

두(豆)는 제사상에 쇠고기, 돼지고기, 조기, 나물, 산적 따위를 놓는 나무로 만든 제기를 말한다. 받침대가 있는 목기이다.

변두지사는 제사에 관한 일이다. 칙유사존은 곧 유사에게 맡기라는 뜻이다. 제사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곧 유사에게 맡겨도 된다는 뜻이다.

증자는 군자에게는 귀한 도가 셋 있다고 하였다. 첫째 몸가짐에 있어 사납고 거만함을 멀리하며, 둘째 얼굴빛을 바르게 하여 성실함을 지키며, 셋째 목소리를 가다듬어 야비함과 배덕을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제사 같은 것이야 유사에게 맡기면 된다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는 ‘조두지사(俎豆之事)’는 아마 변두지사와 같은 뜻이리라.

옆집아재가 동네 유사를 보면서 손으로 또는 눈으로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려 지시를 하면서도 직접 빠진 것을 채우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즉 유사의 일은 군자의 세 가지 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몸가짐은 거만해 보일뿐이며, 얼굴빛은 차가워 보일뿐이고, 목소리는 높아 보일뿐이다. 그것은 주인을 한껏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심이다.

잔치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내가 젓가락을 재빠르게 가져올걸. 그랬으면 나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으로….’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야 어떻든 남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는 마음이 배려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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