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왕국의 당나귀 재판
동물왕국의 당나귀 재판
  • 승인 2016.08.2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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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규성 논설위원
동물왕국에 악성 전염병이 강타했다. 두 달 가깝게 연일 동물들이 살아가기 힘들다고 호소했고, 무기력하게 죽어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동물왕국은 끝장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왕인 사자의 명령으로 모든 동물들이 참석하는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비상회의에 참석한 각 동물 종족들의 대표들은 심각하게 논의를 계속했다. 상황은 심각했다. 사슴도 여우도 기린도 낙타도, 심지어 두더지와 평소 말도 잘하지 않는 순한 양들까지 많은 동료들이 병에 걸려 쓰러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자 결국 회의의 의제는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느냐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동물왕국에 이런 끔찍한 재앙이 발생했느냐로 귀착되었다. 동물들 중 누군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해서 천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물들 저마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고백하기로 했다. 먼저 동물의 왕인 사자가 위엄 있게 시작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긴 한데..... 실은 옛날에 다리를 다친 얼룩말 한 마리를 잡아먹은 적이 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첨꾼인 여우가 말했다. “대왕님! 그것은 전혀 마음에 걸리거나 나쁜 짓이 아닙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님은 원래 육식을 하시니 사냥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게다가 그 발을 다친 얼룩말은 설사 사자님이 죽이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자연에서 살아날 가망이 없었던 생명이었습니다. 사자님은 오히려 얼룩말을 고통에서 구해준 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자로부터 시작하여 힘 있는 육식동물들이 차례대로 하나마나한 고백을 시작했고, 결국 육식동물에 의해서는 역병을 초래할 정도의 죄가 범해지지 않았다는 예상했던 뻔한 심판을 받았다.

드디어 이제는 힘 없는 초식동물의 차례가 되었다. 맨 먼저 순진한 당나귀가 말했다.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굳이 한 가지를 든다면, 얼마 전에 늘 먹던 풀이 아니라 강가의 나무에 움튼 새싹이 너무 맛있어 보여 그만 한 입 뜯어 먹어본 적이 있는 데, 어쩌면 그게 죄가 될지도.....”

그 순간 여우를 비롯한 육식동물들이 일제히 들끓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심한 일을 저지를 수 있지? 풀을 먹고 사는 당나귀가 나뭇잎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 육식동물들이 초원의 풀을 먹는 것과 같지 않느냐? 그것은 엄연히 신의 뜻과 자연의 법칙을 어긴 행위다. 게다가 그런 심한 고통을 당한 말 못하는 강가의 나무는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쳤을까? 우리에게 내려진 재앙은 틀림없이 그 일 때문이다.”

이리하여 동물왕국에 내려진 재앙의 원인에 대한 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육식동물들은 당장 당나귀를 동물왕국에 재앙을 가져다준 죄 많은 동물로 몰아붙인 뒤, 신에 대한 사죄의 표시니, 고통 받은 나무의 피해에 대한 징벌이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죽인 뒤 결국 남김없이 깨끗이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러나 재앙의 원인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왕국의 역병은 지속되었고, 충분한 희생을 치르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그 때쯤은 누구도 당나귀의 재판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했고, 역병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따지지도 않았다.

자연의 섭리에만 따르는 단순한 동물왕국보다 이해타산에 따르는 약삭빠른 인간사회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미 저질러진 사태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심판이 당나귀의 재판과 같이 진행된다면 인간사회도 동물왕국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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