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죽음
한 청년의 죽음
  • 승인 2016.09.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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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윤 새누리교회
담임목사
안치범씨, 당신이 만약 내 아들이었더라면 솔직히 말해 당신은 내게 그리 좋은 아들은 아닙니다. 어느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당신의 성장과정은 부모의 기대에 좀 못 미쳐 보인다는 말입니다.

삼수 끝에 겨우 들어간 지방대학마저 졸업하지 않고 전공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진로로 택해 2년 넘게 버둥거리는 모습도 부모에게는 안타깝고 애처롭습니다. 당신이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면서 장애인들을 도운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장애인을 도왔다니 당신은 부모에게 미련한 녀석이라고 꾸중들어 마땅합니다. 취업준비에 진력해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봉사라니 내가 부모라도 적극 말렸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꾸중을 미리 예상하고 부모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런거야 다 좋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해도 살아서 남을 돕는 일이니까 위안은 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느리고 미련하게 보이는 당신이 그 날에는 어찌 그리 민첩했는지. 불이 난 건물에서 가장 빨리 나와서 119에 신고한 것이 당신이었더군요. 그리고 다시 건물에 들어가 4명의 이웃과 나왔다가 주민들을 깨우러 또 다시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니 부모에게 당신은 참 미련하고 불효한 아들입니다.

살아서 한 번도 부모에게 번듯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듯한 당신이 마지막으로 겨우 보여 드린 것이 당신의 상처난 손과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이란 말입니까? 효도는 못할망정 겨우 남긴 것이 단장의 슬픔이라니. 휠체어를 타고 문상 온 장애인 제자들이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고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온 주민들이 ‘아들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며 감사인사를 했다지만 어찌 그 슬픔에 비하겠습니까?

당신의 부모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자식을 둔 우리 부모들도 이렇게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 날 당신이 불과 연기 속에서 겪었던 고통의 몇 배나 더 큰 진동이 우리 마음을 때립니다. 남을 돕더라도 살아서 도와야지 남을 돕다 내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부모된 자로서 묻고 또 물어 봅니다. 다들 그렇게 자기 각자의 살길을 찾느라 바쁜 이 시대에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당신으로 인하여 슬퍼합니다.

그러나 안치범씨, 우리는 한편으로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누른 초인종 소리가 스무 명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니.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아들을 둔 당신의 부모를 존경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렸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예수님처럼 살다갔군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자 입으로 외치는 목사인 내가 부끄럽게 당신은 정말 예수님처럼 목숨을 버려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는데 당신이 눌렀다는 초인종 소리가 자꾸 들리는 듯합니다.

초인종 소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당신의 초인종 소리가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죽었을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생명을 구했습니다. 안치범씨, 우리는 당신을 ‘초인종 의인’이라 부릅니다. 이제는 우리도 초인종을 누르겠습니다. 이웃이 위험에 처했을 때, 당신처럼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초인종을 누를 수는 없겠지만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누르겠습니다. CCTV가 아니었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당신의 행동처럼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해 보려합니다.

21세기에 이렇게 발전한 우리나라가 크고 작은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세월호에 놀란 가슴이 아직 울렁이는데 핵과 지진이 다시 우리를 위협합니다. 미리 초인종을 눌러주어 고맙습니다. 이 가을에 위험을 감수하며 우리를 위해 기꺼이 초인종을 눌렀던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꼭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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