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지향하되 최적을 선택한다
최선을 지향하되 최적을 선택한다
  • 승인 2016.10.0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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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논설실장
기자가 된 지 25년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신문지면에 고정칼럼을 게재한다. 그동안 수많은 기사와 칼럼를 썼지만, 고정 기명칼럼 게재를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도 부담이 많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란 점을 피부로 느낀다. 어떤 내용을 어떤 생각법으로 풀어내야 할까?

최근 모 일간지 기명칼럼 첫회에서 ‘나는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고 밝힌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적잖이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공익을 지향하는 신문에서 필자의 생존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정 기명칼럼은 최소한 필자에게는 자기 인내를, 독자에게는 생각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기능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또 칼럼의 내용은 크게는 인류의 이익을, 적게는 대한민국과 지역사회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 자신과 소속기관의 이익은 최소한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사와 칼럼은 하나의 지식이다. 지식이 잘못된 신화(myth)나 미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이 객관적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같은 방법으로 실험을 하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자신생존을 위한 글쓰기는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개인의 생존이 아닌 공공의 생존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최선을 지향한다’는 말로 압축하고 싶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답을 찾고자 한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정의든 선(善)이든 말이다.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에 인간의 문화는 진보해 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의 기준점은 다르다.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해답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 사회구성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그때 그때에 맞는 답’을 추구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구체적인 해법찾기에서만 해당하는 ‘생각법’이라고 본다.

‘최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가능한 다수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다수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사심(私心)을 버려야 한다. ‘사심이 있는 사람은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 여론을 왜곡하지 않고, 뻔한 거짓말을 그럴듯한 포장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일은 신문이 더 이상 사회적 공기(公器)임을 포기하는 자세라고 본다. 언론이 스스로 언론 플레이를 하는 사회는 경쟁력은 물론 미래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글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낚시걸이’는 사기행위나 다름이 없다.

‘최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또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라고 본다. 독자를 배려하는 자세는 필자 스스로 해답을 제시하기 보단 독자의 판단을 더욱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모르는(not-knowing) 자세로, 독자가 필자 이상으로 전문가이자 판단자, 혹은 최소한 파트너라는 자세로 글을 쓸 생각이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다수의 공감을 얻는 방법이란 생각에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일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무결점 해법은 인간세상에서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삶의 정답은 찾기 힘드나, 명답은 찾을 수 있다’는 논리와 같다. 그래서 ‘최선을 지향하되 최적을 선택한다’는 말을 한다.

‘최적을 선택한다’는 말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가능한 대안 중 가장 현명한 대안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은 딜레마(dilemma)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안을 선택해도 피해와 손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많다.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의 피해를 가져오는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그나마 이성적인 결정이지 않을까? 그래서‘최적을 선택한다’는 말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은 당연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적을 선택한다’는 말은 자기합리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기합리화는 진실과 팩트 유무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고라면, ‘최적을 선택한다’는 말은 선택의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최소한 생각의 원인이 되는 사실관계만은 모두가 동의하는 ‘생각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최적선택’이 ‘내일의 최적선택’이 아니란 점도 전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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