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卒婚)의 명분(名分)
졸혼(卒婚)의 명분(名分)
  • 승인 2017.05.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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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졸혼이 유행이란다. 우선 필자는 최근 접한 생소한 단어인 졸혼의 의미를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보니, 오픈 사전(네티즌이나 전문 분야의 학자들이 등재한 임의사전)에 ‘결혼을 졸업한다’라는 뜻으로 이혼과는 다른 개념이고, 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념으로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새로운 풍속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물론 사전적 용어는 아니지만, 신조어로 급격하게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노년층에서도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먼저 졸혼의 근원이 될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앞서야 뭔가 개념이 정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사전을 찾아보니,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음’이라고 나와 있다. 그게 전부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아쉬움에 연관 검색어를 찾아보니 백년가약(百年佳約)이라고 나온다. 남녀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다짐하는 아름다운 언약, 즉 말로 하는 약속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결혼이라는 것은 식을 통해 격식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맑은 물 한 사발을 떠놓고 맞절만으로 예의를 다하는 일종의 약속인 것이다.

졸혼, 즉 결혼이라는 관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결혼이 아니어야 하고, 결혼이 유효한 거라면 졸혼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드물지 않게 농담처럼 시작된 졸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서운 속도로 전해지고, 그 유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것도 모르냐’고 일갈을 가하는 당당한 부부도 있다. 졸혼의 의미대로라면 결혼은 서로의 삶을 간섭하는 피곤함은 물론이고 각자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라는 이야기가 된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작 결혼은 ‘아름다운 약속’이라고 하지 않는가. 구속과 억압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아름다운 용어처럼 자리 잡아가는 ‘졸혼’이 두렵다.

이쯤 되면 누구의 요구가 먼저였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힘든 육아와 남존여비의 잔재로 남은 시댁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 필요했던 아내의 요구인가. 아니면 아내의 잔소리와 일탈을 꿈꾸는 남편들의 요구인가.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약자가 다수인 아내 측의 요구일 것이라고 인식하지만,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남편들의 수용도 한 몫 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성의 소유욕을 공고히 하는데 기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성서에서 그리도 금기시하고 있는 남의 아내를 끊임없이 탐하는 남의 남편들의 욕구와 맞물려 불륜(不倫)의 길을 아슬아슬하게 함께 걸어가는 연인들이 현격하게 늘었다.

한때 막장이 아닌 드라마나 소설을 찾아보기 힘든 시기가 있었다. 계용묵의 단편 ‘백치 아다다’의 순결하고 고결한 희생에 가슴아파하고,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의 순수한 사랑에 잠 못 이루던 독자들이 어느새 우연처럼 필연의 자극적인 상황들에 길들여져 가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1996년에 방영된 당시 인기 탤런트였던 유동근, 황신혜가 주연한 16부작 ‘애인’이라는 드라마는 충격이었다. 뒤늦게 내한공연까지 가진 Carry & Ron이 불렀던 I.O.U (I Owe You) 라는 삽입곡조차 흥행될 만큼 아름답게 그려진 불륜, 오히려 그들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모든 반동인물들이 시청자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그 드라마의 주제곡은 아직도 심심치 않게 카페나 커피 전문점에서 들을 수 있다.

사랑은 한시적일 수 있다. 생체학적으로 신경전달 물질의 하나인 도파민(dopamine)의 생성과 감소의 작용으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마침내 권태기를 겪게 된다는데, 이를 어쩌겠는가. 게다가 불륜은 절대적으로 사랑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릴 생각도 없다. 아내보다 남편보다 더 사랑하는 이가 생길 수 있다.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더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굳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행복할 수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부부는 이성이 아니라 가족이고 가족끼리의 사랑은 근친상간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그냥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불륜, 말린다고 사라질 일도 아니고, 대놓고 장려할 일도 아니다. 분명한 건 누군가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급기야 불륜의 상대, 즉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수모를 겪게 할 수도 있다. 사회 통념의 문제가 아니다. 인륜이 질서와 약속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라면 불륜은 네모난 바퀴처럼 늘 삐걱댈 수밖에 없다. 불륜이 재혼 등의 또 다른 약속으로 인륜이 되지 못한다면 서로에게 예의를 다하고 볼일이다.

졸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워 서로의 부정을 눈감아주고 가정이라는 허울을 빈정대며 한 지붕 아래에서 약속을 이행하는 척 가식을 떨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일본에서 건너오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건, 우리에게 졸혼은 평생 시어머니의 병수발에, 남편의 폭언과 폭력에, 자식에게 우렁쉥이처럼 제 살을 다 내놓은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인 노부인의 마지막 치열한 투쟁이었을 수도 있다.

그대, 아직도 결혼을 졸업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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