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汚辱)의 숲
오욕(汚辱)의 숲
  • 승인 2017.06.1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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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크게 나을 것도 없다. 생존의 도구와 방식에 길들여진 채 야생의 본능을 내놓은 개보다 못한 인간군상을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영악하고 지능적인 기능까지 겸비한 인간이 길들여진 개보다 어쩌면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다소 격앙된 표현으로 인간에 대한 존엄을 무시한다고 할 수도 있고, 문학을 하는 사람이 해야 할 말은 아니라고 질타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걸 감내할 정도로 필자는 분노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낯 뜨거운 현실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지금이다.

사회가 다변화되고 지자체 별로 문화센터 등을 통한 학습 기회가 많아지면서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좋은 현상이고, 과거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국악이나 클래식까지 배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전문 예술인들을 경시하거나 ‘해 보니 별거 아니다’는 건방진 인식은 사라져야 한다. 문학 부문도 마찬가지다. 문학을 하는 이가 음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필자도 생업을 명분으로 그동안 단지 취미로 해오던 음악을 하고 있지만, 음악인으로서의 가치 평가는 어림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음악을 전업으로 하는 이들 앞에 서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주눅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을 할 때마다 시를 쓰는 이가 조그만 재주를 덧댈 뿐이니 큰 기대를 갖지 말아달라고 관객들에게 말로, 몸짓으로 표현을 한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다재다능한 초로(初老)의 한 문학인이 SNS에 올린 열 줄도 채 되지 않은 글을 보고 심장이 멎는 모욕감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지는 이렇다. ‘문학을 가르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강이다 뭐다해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글을 쓸 때 하나의 펜을 어차피 두 사람이 잡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가르칠 것도 배울 것도 없지 않은가.’라는 내용이다. 그의 글은 반나절이 가기도 전에 본인이 삭제를 하였음을 지인에게 전해 듣고 실망을 넘어서 절망감을 느꼈다. 그도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면서 어찌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허망함을 안겨 줄수도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재다능한 그는 가진 재주만큼이나 스스로의 재능을 알리는 데에도 부러울 만큼 적극적이다. 배울 점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좋은 작품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언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남기고 타인에게 등 떠밀린 운명처럼 먼 길을 떠났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로 인해서 고통 받는 이들을 걱정했고, 그들에게 짐이 되는 것조차 가슴 아파했다. 그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겸손해져야 한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지식과 상식은 물론이고 정보들이 휴대전화 하나면 해결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배우려는 이는 없고 가르치려 드는 이들만 넘치고 또 넘쳐난다. 이런 때일수록 겸허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같은 산길을 두 사람이 걸어간다고 해서 두 사람 모두 같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앞서 걸어갔다고 해서 오만과 자만에 차서 그 길을 다 아는 양 ‘갈 필요도 없는 길’이라는 방자함은 버려야 한다.

특히 우리가 노인이 되어갈 때 아름다워야 한다. 뒤에 나선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빠르면 어서 좁은 길을 비켜서서 앞서가는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연륜이 묻어난 당부를 하는 것이 도리이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도 있다. 결코 좋은 뜻은 아님에는 분명하다. 순수해진다는 좋은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순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짖어라//오욕의 숲을 거니는 이들의/안면(顔面)을 마주하고/갈라진 이빨 틈으로/피가 배여나올 때까지/거침없이 짖어라/너의 목덜미를 움켜잡은/구속한 밧줄이 끊어지는 그날까지//컹-커엉 커엉-컹//불끈 솟아오른 핏줄/분노로 터져 여기저기 흩어져도/너의 젖은 눈동자에 비쳐지는//부정(不淨)들을 향해 짖어야만 한다//쓸 새 없던 날카로운 발톱으로/굳건하고 메마른 회색 대지/할퀴고 짓이기며/사람과 함께한/인욕(忍辱)의 세월들을 기억하고/넌 짖어야만 한다//커엉-컹 컹컹컹

‘개’라는 시의 전문이다. 아직 많은 분야에서 젊은 노인들이 기득권을 점하고 있고, 취업과 시험의 무거운 족쇄를 힘겹게 끌어가고 있는 늙어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어둡고 슬픈 미래를 미리 보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조언이나 당부가 명령이나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지치는 것은 그들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지치게 만드는 무책임한 가르침과 그들만의 리그에 바늘만한 틈을 해마다 마련해주고 생색내는 금수저가 놓인 밥상들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이들의 성장통 다루듯 뒷짐 지고 당연시 하지 말고, 아프게 하니까 아픈 청춘이고 굳이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구김살 없이 그들이 청춘을 보낼 수 있도록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많이 드시고 충분히 배가 부른 이들은 더 식탐을 부리지 말고 수저를 내려놓고 허기 진 청춘들에게 시장기라도 가실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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