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동학혁명과 4·19혁명
세계기록유산 동학혁명과 4·19혁명
  • 승인 2017.07.1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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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세계평화를 위해서 설립된 유엔기구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게 유네스코다. UNESCO는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약자다.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한 국가 간의 협력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전문기구 중의 하나다. 인류가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보호하자는 것으로 195개국이 정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9개국은 준회원국이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다. 문화의 중심지로서 오랫동안 역할을 했던 파리에 자리한 것은 자연스럽다.

세계기록유산 등록사업은 1992년부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등재신청을 하는 통에 이제는 2년에 한번 씩만 신청을 받는다. 그것도 특정국가의 독점적 신청을 막기 위해서 국가 당 2건의 기록유산만 신청 받고 있지만 탈락이 많다. 기록유산의 가치가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을지라도 세계적인 시각에서 별게 아니라면 엄격하게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의 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번에 우리 문화재청에서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과 4·19 혁명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등재신청 대상으로 선정해 내년 3월 제출하기로 최종결정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등 13건을 보유하고 있다. 4·19혁명은 5·18보다 20년 앞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며 방점을 찍어 주목해야 할 대목은 주체가 모두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사례는 없다. 순수한 열정만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후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 단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고 학원으로 돌아가 사회혼란을 수습하는 질서유지운동에만 열성을 다했다. 5·18민주화운동 역시 4·19정신을 이어받아 학생들이 도화선이 됐으나 스스로 ‘시민군’으로 호칭하는 통에 학생보다 시민이 부각됐다.

5·18은 군부의 잔학한 탄압으로 숱한 희생을 치른 끝에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7년 후에야 숨통을 트게 됐다. 그러나 애써 찾아준 민주화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신군부 잔당들에게 정권을 헌상한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들이 힘을 합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릴레이정권을 시현했다면 지금 이 나라는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와 같은 낡고 썩은 이념에 매달려 갈가리 찢기고 호남 대 영남이라는 지역분할과 같은 비극적인 정치를 모면했을 것이다. 확고한 국민의지 하에 정통성이 인정된 민간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도 우위적 입장을 견지하며 민족통일의 기운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넘쳐흘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양김의 분열이 가져다 준 패악의 큰 단면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떠받들어야 하는 무지몽매한 국민들만 애가 탈 뿐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등재신청을 한 바 있다. 당시의 조선정부,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 기록물과 혁명군에 가담한 동학농민군, 일본공사관 등이 생산한 것들이다. 그 외에도 개인의 견문기록문 등 다양한 주체세력이 생산한 기록물로 구성됐다. 모두 175건이며 이미 문화재로 등록된 동학농민군 사발통문, 흥선대원군 효유문, 양호전기 등이 포함됐다. 맨 처음 신청은 전봉준이 고부에서 기포(起包)했기 때문에 정읍시에서 주관했으나 탈락했다. 두 번째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앞장서 세계기록유산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재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작년 11월과 금년 5월에 대대적인 학술대회를 열고 전문학자의 학문적 연구를 더한 것은 동학혁명이 추구했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4·19혁명은 동학 이후 76년 만에 썩고 부패한 독재정권을 갈아치우는데 성공한 혁명이다. 동학혁명군은 무력으로 전주를 함락하고 조선정부와의 협약으로 각 고을마다 동학군 집강소를 설치했으나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정부를 뒤엎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결국 공주 우금치에서의 전면적 패배로 막을 내렸다. 반면 4·19는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웠다. 따라서 그 기록물도 풍부할 수밖에 없는 성공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1년도 못돼 5·16군사쿠데타에 모든 것을 뺏겼다. 야당인 민주당이 7·29총선에서 3분의 2를 획득했으나 신구파로 분열하면서 허약하기 짝이 없는 장면은 쿠데타의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압조차 하지 못하고 수녀원에 스며들어 숨는 무기력을 노출시켰다. 후일에 분열한 김영삼은 구파였고 김대중은 신파였던 점을 보면 그들의 DNA에는 분열의 유전자가 끼어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로서 4·19는 의거로 전락하고 30년 후에야 겨우 문민정권이 탄생한다. 고개 숙이고 기어들어간 사람들은 산업화의 역군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4·19기록물은 빈약하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등에서 열성적으로 수집소장하고 있으며 집대성한 책도 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4·19혁명공로자회(회장 유인학)에서는 4·19세계화를 위한 국제심포지엄 등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이번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확실시된다. 동학혁명과 4·19혁명은 영원히 빛나는 민족의 긍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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