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향유
소유와 향유
  • 승인 2017.07.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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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선 대구교육대
학교 대학원 국어
교육과 강사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기려고 인물을 물색한 뒤 청문회를 하는 걸 본다. 인물의 부적격 사유를 내세워 거부하는 여론에 맞서 그래도 내가 요직을 맡겠다는 인물들을 보면 소유와 향유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소유는 가짐이요, 향유는 누림일 텐데 벼슬은 내 명예로 거머쥘 소유인가? 내 능력을 돌아본 뒤 실천 할 향유인가?

조선시대 ‘명재’가 정3품 호조참의 벼슬을 받으러 한양 가던 일화를 떠올려본다. 도중에 과천에서 남계와 토론하면서 왕명을 받고 온 박세채에게 내가 다음 세 가지를 이행할 수 있겠는지 묻는다.

첫째, 서인은 남인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 된다.

셋째,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지금의 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에 박세채는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벼슬에 들어 갈 수 없다.”

명재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숙종에게 ‘삼인동사(同事)’의 명을 받았던 박세채, 송시열도 이에 공감하여 출사를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소유에 앞서 향유에 자신 없음을 먼저 돌아본 현명함이 있었기에 후세에 욕먹는 일은 되지 않았겠다. 그렇다면 바림직한 향유의 본보기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노성 윤씨 집안은 흉년에 굶어죽는 사람들을 위해 의전(義田)과 의창(義倉) 제도를 운영하며 열여덟 개 종계(宗契)에서 매년 200석 쌀을 거두어 수해나 가뭄, 빈민 구휼 사업을 하였다. 현재, 의창 창고 건물 자리에 의창비가 서 있다. 많이 가진 자가 못 가진 이웃을 돌아보고 베푸는 이런 누림이라야 소유를 뛰어넘는 향기로운 향유라 하겠다. 이웃 뿐 아니라 나라의 비운 앞에 6형제가 전 재산을 모두 팔아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가문도 있다. 조용헌의 ‘명문가’ 라는 책에서 우당 이희영 6형제 가문을 만났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다. 요즘 돈으로 600억 원되는 재산을 모두 팔아 만주에 무력 항쟁 기지를 세우기 위해 떠났다. 신흥학교를 세우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고 고종을 북경에 피신시키려고 하는 등 뒤에 숨어서 오로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나중에는 끼니도 못 잇고 병든 신세가 되어 1945년 일본 패망 뒤 살아남은 사람은 이성재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지금 종로구에 우당기념관이 있고 독립 유공자 후손을 돕는 우당장학회(1984년 설립)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더 가진 자가 재산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일에 베풀고 나누는 즐거움으로 살아감이 진정한 향유가 아닐까?

굳이 많이 가져야만 향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이 가지고도 별로 누리지 못하는 삶이 있는가 하면 별로 가진 것 없어도 온전히 다 누리는 삶이 있다. 안대희가 쓴 ‘선비답게 산다는 것’ 책에서 1519년 기묘사화 때 ‘사재’가 정계에서 쫓겨난 뒤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재는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이 있다는 팔여거사로 호를 짓고 자연을 즐겼다. 보리밥, 온돌에서의 잠, 맑은 샘물 마시고, 책 읽고, 봄꽃과 가을 달 보는 것, 새소리 바람소리 듣는 것, 매화, 국화 향기 맡는 즐거움은 누가 뺏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경쟁해서 얻어 가져야 할 것이 소유라면 즐겨도 뺏을 이 없는 자연은 얼마나 여유롭고 넉넉한 향유인가? 심지어 유배지 임자도에서도 화가 조희룡(철종 2년, 1851년)은 “내 떠돌기 좋아하는 줄 그대는 아는가. 바다를 구경하라 하늘이 귀양 보낸 거야.” 하는 회인시를 쓰기도 했다.

굳이 소유와 향유를 비교해보자면, 그 넉넉함이나 만족면에서 보더라도 향유만큼 넉넉하고 충만한 것도 없겠다. 소유의 허망과 향유의 충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품에 들어 산다.

나도 향유를 누리고 싶어 퇴직 후 시골에 조그만 집을 마련하였다. 집 이름을 ‘베나(베풀고 나눔)의 집’이라 짓고 이웃과 친구들, 그리고 굿네이버스 같은 복지활동에 도움 되는 일에 시골집을 열어두었다. 어저께는 대학 동기 모임을 시골 집 정원에서 했는데, 20명 중 부부가 참석한 넷 집에, 다시 생각해보는 결혼식(Remind Wedding)을 깜짝 놀이로 하였다. 흰 비닐 식탁보를 신부 드레스로 입히고 유치원 아이들 생일잔치 때 쓰는 왕관을 머리에 씌운 날라리 차림새지만, 40여 년간 부부로 살아온 정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다시 새겨보는 의미는 여유를 한껏 누리는 멋이었다. 여름의 녹색 잔디밭, 척척 늘어진 푸른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모인 이들 마음의 평수를 풍성하게 넓혀주는 향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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