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게 꽃을 권하며
노인에게 꽃을 권하며
  • 승인 2017.08.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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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다 되어간다. 필자가 매우 존경하는 동화작가 고 정채봉 시인의 이야기다. 그는 그의 작품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최근 일어난 문인들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의 과용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사건이 되어 기사가 된 예는 수도 없이 많은 걸 보면 흔한 일은 아니다. 글을 쓰는 이들을 분류하기는 힘이 든다.

장르도 이미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넘나든지 이미 오래고 이젠 그들의 삶이 얼마나 그들의 작품과 잘 어우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심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참 무거운 일이다. 아무래도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야말로 정화수 (井華水)처럼 맑고 투명한 그의 작품과 삶은 늘 읽는 이에게 감동일 수밖에 없다. 그가 쓴 에세이 집 ‘좋은 예감’의 한 대목을 길어보자.

우리는 새벽 찬바람 속에서 그곳을 지나다 말고 자연스럽게 해장국 집을 떠올렸고 또한 쉽게 찾아 들어갔다. 해장국을 먹고 나서다 말고 문득 나의 친구가 말했다. “우리도 장 보러 가자.”

“어디로?” “꽃 시장에.” “그곳엔 왜?” “꽃 사러 가는 거지 뭐.” “꽃은 사서 뭐 하게?” 그러자 친구는 답답한 녀석 본다는 듯 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무슨 일이 있어야만 꽃을 사니? 그냥 한 아름씩 사서 안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그의 친구답지 않은가. 아름답다. 지란지교(芝蘭之交)란 이런 것이 아닐까. 언어선택은 참으로 중요하다. 사내 서넛만 모여도 좁은 도로를 점령한 채 고성방가와 욕설로 우정(?)을 과시하는 객기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꽃을 사러 가자는 두 중년 남자들의 대화를 상상해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지나친 설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지나친 건 지하철이고 공공장소고 가리지 않고 내뱉는 노인들의 비속어와 여성비하 발언들이다. 노인차별이라 일컫지 마라. 청년실업 등으로 움츠려든 젊은이들에게 보란 듯이 유세하는 노인들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을 잉여인간으로 만든 건 지금 노인들의 탓도 크다. 물론 일반화된 부분을 얘기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 노인들도 많음을 알고 있다. 의학의 발전이 생명연장에는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그에 상응하는 노인 인성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했으면 한다. 지금 이와 관련된 교육기관들이 많지만, 취미나 건강과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일반적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이들은 잘 ‘커’야 하고 청년들은 잘 ‘살’아가야 하고 노인들은 잘 ‘죽’어가야 한다. 필자가 안하무인(眼下無人)처럼 느껴지고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인륜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문인들이 오래 전에 탈고한 원고들로 곤혹을 치르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내각 구성 당시에 인선과정에서도 오래 전의 발언이나 행보로도 좌절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살아가는 혹은 죽어가는 동안 상기한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다. 평생을 노인처럼 살아가는 청년도 많고, 청년처럼 살아가는 노인도 많다. 전자는 참 슬픈 예지만 실제로 많다. 연로한 부모님이 자식 눈치 보는 것처럼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아닌 부분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청년의식’이 이미 거세되어 버린 가엾은 청년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오륜 중의 하나인 장유유서는 늘 불만족스러웠다. 어른 같지 않은 어른도 많은데,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인륜에도 어긋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그 잣대가 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다름 아닌 인격이다. 인격은 또 무엇인가? 사람의 품격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는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상대적인 것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장유유서는 서로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뭔가 맞아 들어간다는 소리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기본적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어떤 의사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사업적인 목적이나 그 외에 다른 목적에 따른 성과를 올리는데 있어서의 옳고 그름은 다른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되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따위의 일반적인 옳은 것들을 얼마나 잘 지키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옳은’ 잣대들이다.

노인에게 잘 죽어가야 한다는 말에 발끈할 이유 없다. 어차피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큼 하루하루 죽어간다. 굳이 나누는 이유는 역할과 기능면에서 보더라도 유아기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의 가치관의 변화가 크기 때문이다. 의식이 관념으로 고착화되면 답이 없다. 잘 커가고 살아가는 것은 몇 번의 실수나 실패에도 다시 일어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지만, 잘 죽어가는 이들에게 실패란 모욕이나 수치를 견뎌낼 시간이 별로 없다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죽을 때가 다 되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욱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한다. ‘당대에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대물림한다’는 무서운 말이 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야 외롭지 않다. 베풀고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잘 죽어가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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