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가(御駕)를 멈추고 소녀를 보라
어가(御駕)를 멈추고 소녀를 보라
  • 승인 2017.09.0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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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지방자치제의 독립성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방자치제도는 허울뿐인 지방자치법에 의해 형식적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1991년에 들어서야 각급 지방의회가 구성되고 1995년에 기초·광역자치단체 의원 및 장에 대한 4대 동시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아오던 부화뇌동(附和雷同)하던 관료들의 늑장 민원처리로 시행착오를 겪어온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각종 시민단체들과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활동과 모임을 구성해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기 위한 재능기부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벌어진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대구 중구청은 4년간 70억원을 들여 중구 수창동·인교동 일대를 순종황제 어가길로 조성했다. 예산도 예산이지만,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였는가 하는 비평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남순 역사공간을 만들고 달성공원에는 높이 5.5m에 달하는 순종 동상까지 건립했다. 물론 공무가 늘 그렇듯 명분이 분명하다.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 그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다크투어리즘을 ‘역사교훈여행’이란 용어로 사용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재난이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으며 교훈을 얻는 여행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장소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00만 명이 학살당했던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쯤 되겠다. 반면 순종황제의 어가길이 무슨 교훈으로 남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가(御駕)는 임금이 타는 수레다. 당시 1909년 1월 7일 서울에서 궁정열차를 타고 내려온 황제를 보기 위해 3만 명의 인파가 모여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군(君)으로 하여금 나라를 지켜달라는 바람이 가장 컸을 테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믿고자 하는 염원이 다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차에서 내려 2.1km 정도의 행보는 더 가관이다. 일본의 신사가 있던 달성공원에 가서 참배를 하고 친일 인사들을 격려하고 이토히로부미의 특사로서의 역할을 충실이 이행했던 순종, 그의 동상을 보면서 교훈을 얻으라는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한편 2016년 12월에 일본의 로비로 좌절되었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남미에서 최초로, 미국에서는 세 번째로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제막식 날에 궂은비까지 내려 더욱 비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였다는 현지소식에 필자는 뭉클한 마음과 더불어 어가길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 필자가 칼럼에서 중구 상인들의 반발로 소녀상 건립이 좌절되어 인적이 드문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눈에 잘 안 띄는 2·28 공원에 건립함으로써 마찰이 무마된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역사교훈여행은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한다. 소녀상, 나라를 잃은 어린 소녀가 광란의 전쟁의 도가니에서 노리개로 전락한 이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의 조형물만큼 어둡고(Dark), 검고(Black), 슬픈(Grief) 일이 어디 있는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국립 5·18 민주묘지도 역사교훈여행지로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군부시절에 독재와 부정함에 맞서 싸운 시민들에게서 역사참여를 배우고, 진실의 소중함을 배우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곳으로 광주가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뜻있는 수많은 이들의 넋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넋’을 놓아서는 안 된다. 기준은 간결하되 명백해야 한다. 어설프게 지역 관광 상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친일 행적들을 미화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도 없을뿐더러, 가해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소녀상의 건립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역사교훈여행’이라는 명분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국치(國恥)였다. 나라가 수모를 겪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를 감추거나 왜곡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이를 잊지 말되, 후세에 뭔가 뚜렷한 교훈이 될 만한 공감이 필요하다. 이미 마무리가 되어 완성되었다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속담에 ‘잘못된 길을 계속 가는 것보다는 제대로 가는 것이 옳다’는 말이 있다.

조선의 국모가 시해당해서 그 유해조차 남아 있지 않은 수모조차 겪은 마당에 순종의 신사참배쯤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가길로 그럴싸한 터를 잡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 버스 회사는 151번 버스에 소녀상을 태웠다. 일본의 즉각적인 유감 표시에도 이달 말까지는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동아운수 대표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필자는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에 충실했던 제왕의 행차를 기념하고 그의 친일 행적을 돌아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의 어가(御駕)에 소녀를 태우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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