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처럼 스러져 간 시인, 마광수
연탄재처럼 스러져 간 시인, 마광수
  • 승인 2017.09.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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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혼자’라는 외로움의 끝은 어디일까. 죽음이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시기와 사유는 다를지언정 언젠가는 혼자 떠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외로움조차 부정하기 위해 동반결의(同伴決意)를 실행에 옮기기도 하지만, 그 또한 공간의 동일함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 이후의 시간은 어떤 것도 명확하게 증빙된 것은 없으니 말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수많은 이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이들도 그들이다.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현실은 영원한 선악의 개체는 없다. 애매모호한 각자의 입장과 처신으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래서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다.’라는 말이 있나보다. 늘 우리는 누군가의 아군이고자 한다. 적군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렵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도 ‘나 홀로 조직’은 없다. 그들도 두렵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5일 오후 12시 51분 경 마광수 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소설이나 수필 등의 산문을 쓰는 작가로,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더 유명했지만 원래는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었음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그를 좋아하는 축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에게 닦달을 하거나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1991년에 발표한 그의 문제작 ‘즐거운 사라’는 자유로운 성(性)을 내세운 ‘또 다른 억지’처럼 여겨져서 불편하게 읽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릇된 예술의 잣대로 당국이 응징(?)함으로 그에게 전과 2범의 오점을 남긴 사건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이 그에 대해서 오히려 우호적인 이해를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 그의 박사 학위논문은 단언컨대 ‘명품’이다. 시인 윤동주 작품에 나타난 상징적인 표현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한 ‘윤동주 연구’는 학위논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짜깁기의 메운 자국이 없을뿐더러 군더더기가 없다. 그런 그가 학자로도 문학인으로도 머무르지 못한 채 이젠 더 이상 그의 연구도 작품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로테스크(grotesque), 마광수 시인과 함께 연상되는 형용사다. 원래는 이탈리아어로 특이한 의장(意匠)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엽기적이나 괴기스러운 것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의 삶 자체가 아라베스크 무늬만큼이나 난해하다. 25살에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기염을 토하는가 하면, 1984년에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로 안도현 시인이, 1985년에는 기형도 시인의 ‘안개’라는 작품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당시 예심 심사위원으로도 그는 이름을 올렸다. 수천편의 응모작들 중에서 본선에 올릴 열댓 편의 작품들을 선정하는 데 그의 역할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그가 재직하던 대학의 연세문학회 지도교수로 있던 당시 그의 제자였던 기형도의 작품을 선정한 것은 분명 문학을 꿈꾸는 이들의 가슴에 쇄기를 박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게다가 그가 한 여성잡지에서 나눈 인터뷰에서 “기형도는 난해해. ‘물속의 사막’,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가 있는 시 제목이 ‘빈집’이야. 무슨 연관이 있어?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고나 기형도를 좋아하는 걸까. 어려운 글은 무조건 못쓴 글”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서 그를 낙점한 것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언론과 방송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가 수업 중에 연행되고 조사받고 포승줄에 매여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플래시를 터뜨리던 그들이 그가 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천재소설가라고 추켜세운다. 이게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불과 이십여 년 전에 사지로 내몰며 마녀사냥에 뒤처질까 사냥개처럼 달려들던 그들이 이제는 그를 둘러싼 미담과 그의 제자들까지 찾아다니면서 그의 진혼에 이바지하는 모양새가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역겹다. 그의 예술적인 수준까지야 어찌되었건 시인 윤동주의 작품들 중에서 10편이나 등장하는 자학적인 시어 ‘부끄러움’을 길어 올리는데 마중물이 되어 주었던 그의 논문의 가치를 외면하던 언론이 이젠 그가 없었으면 시인 윤동주가 없었다고 극찬을 한다. 진작 그를 먼저 알아봐 주고 그의 작품을 해석해 주었더라면 그리도 오랜 시간 외롭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그는 당당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보란 듯이 윤동주 시인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남기고 떠났다. 그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청년 윤동주라는 한 인간의 고뇌와 외로움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욕정(欲情)’을 도구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윤동주 시인을 일컬어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라고 주장하던 그가 문학을 함부로 더럽힐 리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대중의 무리들로 인해 상처를 두 번 다시 받지 않기 위해 영면(永眠)을 선택한 그의 고달픈 잠을 깨워선 안 된다. 적어도 더 이상은 그를 식어버린 연탄재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그는 뜨겁게 살다간 사람이었음은 분명한 듯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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