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는 잘못 알려졌다
신숙주는 잘못 알려졌다
  • 승인 2017.11.1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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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역사가 모두 진실만은 아니다. 사관에 의해서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정사가 아닌 야사에서 거론되는 문제거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얘기들은 상당부분 지어낸 것이거나 과장된 것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후세 사람이 전해져 내려온 얘기들을 모아서 책으로 남긴 것은 기록자의 주관과 판단이 좌지우지하는 바가 커서 진실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부인하게 되면 역사의 기록은 남아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보게 되어 과거에 대해서 캄캄하게 되기 쉽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거나 해석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많은 기록들을 살피되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고 냉철하게 해석하여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에 치우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인의 행적과 관련하여 바라보면 이해가 분명한 일이 대부분이어서 자칫 큰 오해를 낳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수많은 왕조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하고많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나마 조선시대와 가장 가까운 느낌을 갖는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왕국의 말로가 왜놈들에게 강제로 합방되는 통분을 겪었고 독립을 위해서 수십 년 동안 싸워왔으며 창씨개명이라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일본과의 숙적감정(宿敵感情)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하여 멀쩡했던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어느 날 친일파로 변신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국인들은 왜놈들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것은 광복과 함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극명하게 갈리게 되면서다. 어제까지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애국지사가 사실은 일제의 앞잡이였다는 소스라치게 놀랄 사건이 밝혀지는가 하면, 2.8독립선언서를 쓴 이광수와 3.1독립운동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이 친일파로 변신하였다는 이유로 반민특위에서 쇠고랑을 차고 심문을 받는 경천동지할 사건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자처하는 윤치호 역시 친일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 뿐이 아니다. 학계와 문화계 인사들도 부지기수로 변신과 배신을 거듭한 사실이 드러나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그 명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친일로 기록된 사람 중에도 억울한 면이 있을 수 있으며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사실은 친일행적이 뚜렷한 이가 없을 수 없다. 역사는 그만큼 정확한 것 같으면서도 엉성하다. 세월의 더께가 그만큼 두껍기 때문이리라. 조선왕조의 기록 중에서 후세에 가장 빛나는 이름은 아마도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이 아닌가 싶다. 훈민정음을 발명하여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해준 세종의 치적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바다싸움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은 천하명장 이순신의 전과는 민족을 들뜨게 만드는 힘으로 남아 있다. 세종의 손자인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삼촌인 세조에 의해서 영월 청량포로 쫓겨났다가 비명에 죽는다. 이 슬픈 역사는 수많은 이야기꾼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형식으로 전해졌지만 이광수의 단종애사는 그 백미다.

단종의 이야기는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져 국민의 눈물을 자아냈다. 영월을 찾는 이들은 반드시 청량포에서 단종이 겪어야했던 시련과 공포를 맛보며 눈물을 훔친다. 세조는 왕으로서 능력이 출중했지만 조카를 죽인 비정의 왕으로 묘사되어 역사의 가닥 속에서는 크게 환영받는 인물이 못된다.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단연 사육신이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여섯 사람의 충신은 세종대부터 한글창제와 온갖 과학적 업적을 남기는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다. 이들은 단종제거를 반대하여 죽음에 이른다. 이 때 이들과 동문수학하며 한 솥밥을 먹었던 신숙주는 세조 편에 서서 그의 왕조를 돕는다. 그가 워낙 뛰어난 학자였고 미래를 내다보는 경세가였기 때문에 아마도 세조는 그를 거사 전부터 포섭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조를 도와준 사람들이 반대한 사람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름이 신숙주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았기에 한글반포와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쳐 봉직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한자의 한국어 발음을 표준화하기 위한 ‘흥무정운역훈’과 ‘동국정운’등 운서(韻書)를 편찬하거나 집필했다. 또 일본견문록 ‘해동제국기’를 쓰고 전투와 화물수송을 겸하는 조병선(漕兵船)을 건조하게 하는 등 큰 역할을 다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세에 ‘숙주나물’로 대표되는 배신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특히 아내 윤씨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자살했다는 단종애사의 기록은 신숙주를 죽이는 감정의 극치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사육신의 비극이 터지기 5개월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아내자살 사건은 소설가의 픽션이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소신과 신념 또는 이념에만 따르지 않고 이해(利害)에 따라 움직이는 수가 많다. 왕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신하의 도리로 알려졌던 시절에 신숙주는 경세가로서의 주관을 지켰다고 보는 것이 옳은 평가 아닐까. 배신자 신숙주를 경세가 신숙주로 새로운 눈을 뜨는 것이 후인들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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