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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대구논단

타조는 왜 머리를 박는가 - 속성화 된 습관을 어찌할까

기사전송 2017-12-21, 21: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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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기를 포기한 새 중에서 대표적인 새 하나가 바로 타조(駝鳥)입니다. 타조의 ‘타(駝)’는 낙타 또는 곱사등이를 지칭합니다. 새이기는 한데 낙타(駱駝) 또는 말(馬)의 성질을 가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말 마(馬)’ 변의 글자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타조는 생존을 위해 날기를 포기하였고, 삶의 터전도 사막 언저리를 택하였습니다. 삶의 조건이 나쁜 곳에서 도리어 기회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의 삶은 먹이가 생기면 얼른 먹어치우고 적이 나타나면 냅다 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긴 세월 누적되면서 몸의 모양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타조의 머리는 상대적으로 작아졌고 다리는 여느 새보다 훨씬 길고 튼튼해졌습니다. 타조의 머리가 몸집에 비해 매우 작은 까닭은 그만큼 깊이 생각할 것이 없었기에 뇌의 용량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 다리가 튼튼한 것은 역시 다른 생각 없이 마구 달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타조는 다른 새들에 비해 목이 매우 깁니다. 그것 역시 황량한 벌판에서 먹잇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일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눈이 매우 큽니다. 먹잇감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타조는 깃털이 아니라 솜털을 몸에 두르고 있습니다. 날아오르려면 깃털이 있어야 하겠지만 밤중에 추위만 이겨내어야만 하니 솜털이 돋아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조는 지금의 몸집을 갖춘 채 오늘도 사막을 달리며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말처럼 달리는 경주에도 동원되는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퇴화된 날개가 있고, 두 다리가 있어 조류(鳥類)로 분류될 뿐 대개의 속성은 그저 다른 네발짐승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또한 이 타조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보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고정된 삶의 양식 속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타조는 사람들에게 쫒기면 일직선으로 냅다 달린다고 합니다. 다리의 힘이 워낙 좋아서 대개의 사람들을 따돌립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중간에 구간을 정해놓고 엎드려 있다가 자기 앞으로 타조가 달려오면 벌떡 일어나 달리기를 계속하는 술수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타조를 따라잡을 수 없으면 자동차를 동원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몸과 마음이 지친 타조는 최후의 수단으로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는다고 합니다. 자기 눈으로 위험한 순간을 목도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길에서 볼일을 보게 된 사람이 자기 눈만 감으면 된다는 생각과 상통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를 처박고 몸과 정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에 사람들은 타조를 상자 속에 집어넣게 됩니다. 이로써 타조 사냥은 끝이 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타조들이 이처럼 머리를 처박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집단 무의식에 의한 속성을 깨뜨리는 타조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능적으로 길들여져 머리를 처박았지만 한 돌연변이가 나타나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달려야 하는가?’ 하고 되돌아서서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노려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하여 되돌아보는 타조가 점점 늘어난다면 또 한꺼번에 일제히 뒤돌아본다면 타조 사회에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타조의 눈은 어쩐지 우수(憂愁)에 찬 굵은 눈입니다. 그 우수에 분노(憤怒)를 더한다면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올까요.

그렇군요. 타조 이야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언제까지 달려야 할지요.

‘내가 왜 이렇게 달려야 하지?’

되돌아서서 질주를 다시 생각해보는 용기와 지혜, 어쩌면 이것이 가장 필요한 게 우리들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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