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 승인 2018.01.23 20: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봉조 수필가
새해 아침, 엘리베이터를 탔다.

급하게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다. 위층에서 먼저 타고 내려오시는 분은 나보다 네댓 정도 연상으로 보였다. 눈이 반짝 마주치며 동시에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나는 거울을 보며 두 손바닥을 이용해 마무리가 덜 된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기고 있었다.

“아이구나, 머리카락 색깔이 진짜로 자연스럽고 좋네. 얼굴이 예쁘니, 더 멋있어 보인다”라고, 차분하게 읊조리던 그 분의 말씀이 자꾸 메아리를 만들어 나에게 돌아오고는 한다.

앞의 말은 간혹 듣고 있지만 뒤에 따라온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슬며시 얼굴이 붉어지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염색을 하지 않은 지 꼬박 2년째, 이제는 어색함을 넘어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이 아주 익숙해졌다. 어떤 자리를 가더라도 망설임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희고 검은 머리카락이 적당하게 뒤섞인 은발이 오히려 이목을 끌거나 분위기를 무마시키는 화제 거리가 되기도 하니 고마운 일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분명하지 않은 나의 이목구비의 특징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장생활을 이유로 20년 가까이 염색에 절여졌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기르고 싶었던 것이, 이태 전 일이었다. 처음 몇 개월 간 염색됐던 머리카락이 충분히 길어 나오기까지 어려운 과정이 어찌 없었을까. 늙어 보인다며 혀를 차는 친구들과 깔끔하지 못해 천박해 보인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친지들, 직접 말은 못하고 가까운 지인을 통해 전해오는 안쓰러운 표현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TV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치인이나 행정가, 연예인들 사이에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더러 눈에 보이니, 반갑기가 그지없다.

보는 사람의 취향이 모두 같지는 않겠지만 경우에 따라 멋과 개성의 표상으로까지 회자되고 있으니, 어려운 시간을 참 잘 견뎌냈구나 싶어 스스로 대견하다 칭찬을 하기도 한다.

처음 흰 머리카락이 부분적으로 길어 나올 무렵 정말 보기가 싫다며 뒷자리 담화를 즐기던 지인들이 이제는 ‘멋지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주니, 그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멋으로 탈색을 하고, 그 위에 회색이나 빨강, 초록, 연노랑에 파란색까지 다양한 색깔의 염색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했으니, 머리카락 색깔로 이상하게 쳐다보던 시기는 지나간 모양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던가. 하지만 ‘얼굴이 예쁘니, 더 멋있어 보인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쑥스럽다. 길을 걸으면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실룩거린다. 은행 창구에서도 이어폰으로 듣던 팝송 자락이 콧노래로 흥얼흥얼 소리를 내며, 발바닥이 저절로 장단을 맞추고 있다. 누구라도 만나기만 하면 따뜻한 커피를 대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기분이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있었던가. 다시 볼 일이 없을 지도 모르는 우연히 만난 상대에게, 이왕이면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서로를 즐겁게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래, 웃음도 전염이 된다고 했다.

좋은 말은 듣는 사람의 뇌리에서 엔도르핀이 솟아나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하고, 말을 한 사람에게도 그 기분이 그대로 전해져 주변의 분위기가 밝아지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젊은 아빠의 가슴에 안긴 어린아이를 보며 “아빠를 닮아서, 참 잘 생겼네.”라고 관심을 보였다. 젊은 아빠와 아이가 동시에 방긋 웃었다. 그리고 먼저 내리는 나에게 “안녕히 가세요.”라며 큰 소리로 인사도 잊지 않았다.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새해 아침에 기분 좋은 출발로 한 해가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 달콤한 기대감까지 갖게 되었으니, 한 마디 말의 힘이야말로 천 냥 빚을 갚고도 남을 것이라 여겨진다. 사교성이 없어 무뚝뚝하고 칭찬에 익숙하지 못한 나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온, 새해 아침이다.

별다른 노력이나 도구가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열심히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지나치게 과장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왕에 하는 말 듣기에 좋은 말로 조금쯤 부풀리면 어떠랴 싶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