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왜 친절하지 않는가
판사는 왜 친절하지 않는가
  • 승인 2016.10.18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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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소송지원 변호사
법정에 대기하면서 가끔 보는 장면이 있다. 70세 된 A가 지인 B에게 차용증도 없이 현금 3천만원을 빌려주고 돈을 돌려받지 못하여 민사소송을 걸었다. 판사님이 ‘돈 빌려준 증거가 있느냐’라고 하니 A가 ‘현금으로 주었고 차용증도 없다. 그렇지만 내가 빌려준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고, B의 변호사는 ‘B가 돈을 빌린 적이 없고, A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아주 조리있게 3∼4분 이상 말을 하여 판사가 그 말을 다 들어주었다. 판사가 A에게 ‘증거가 없어 이기기 곤란하다’라고 말하니 A가 ‘저는 법을 잘 모르니 뭘 준비하여야 하는지 판사님이 저에게 알려주세요’라고 하고 판사는 ‘알려줄 수 없으니 본인 재주껏 알아서 하세요. 나가서 법률전문가에게 물어보세요. 다음 재판일은 언제입니다’라고 말하고 재판을 끝냈다. 그러자 A는 법정을 나와 ‘판사이기 이전에 공무원인데 이렇게 민원인에게 불친절할 수 있느냐, 똑똑하면 다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판사의 불친절은 정말로 역사가 깊지만 이는 민사소송의 원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민사소송법은 ‘진실’의 발견보다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 공정한 재판의 진행’에 더 큰 중심을 두고 있고, 진실을 추구하다보면 무리한 불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불공정한 재판이 진행되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진실’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고 있고 ‘진실’과 ‘공정’이 대립될 때는 ‘진실’이 아닌 ‘공정’을 택하도록 한 것이 우리 민사소송법이다.

예를 들어 시골노인이나 깡패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았다’면서 법원에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제기하였을 때 ‘돈 빌려준 증거’가 없다면 똑같이 지게 되는 것으로 시골노인이라고 하여 돈 빌려준 증거 없이도 재판에 이기는 경우는 없다. 시골노인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깡패도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줄 수 있으므로 시골노인 말이라고 더 믿어주어야 하고 깡패의 말이라고 불신한다면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판사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엉터리 재판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판사는 소송당사자의 지식, 재력, 범죄전력 등 모든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법 앞에 공평하다’는 대원칙 아래 재판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동등한 대하고 동등하게 재판해야 한다.

민사재판은 축구 시합과 유사하여, 판사는 심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원고와 피고는 축구팀과 같은 지위에 있다. 소송의 당사자인 원고나 피고는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서로 재주껏 재판을 준비하여 재판에 임하여야 한다. 돈이 없거나 배움이 짧아 재판에서 권리주장을 할 능력이 부족하여도 판사는 원고와 피고의 재판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변호사를 여러 명 선임한 대기업과 법을 잘 모르는 시골노인 사이의 재판일지라도 판사가 시골노인편을 들어 준다면 그때부터 불공정한 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판사는 법정에서 소송당사자의 법률관련 질문에 대하여는 더 불친절할 수 밖에 없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판사는 법률을 잘 알고 공무원으로서 친절의무가 있지만 재판에 임하는 순간부터는 ‘공정한 진행, 어느 당사자를 편들어주지 않는 것’이 재판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므로 어느 한쪽에게 ① 소송진행 방법을 알려주는 것 ② 법률적인 도움을 주는 것 ③ 기타 상대방 당사자가 불공정한 재판이라고 오해를 주는 행동은 할 수 없다. 이러한 원칙을 지키는 것이 ‘법률가로서의 양심’에 부합하는 행동이고 올바른 판사의 태도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양심에 따른다면 당연히 시골노인을 도와 주고 법률적인 질문을 하는 민간인에게 친절하게 답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재판에 있어서 만큼은 어느 한쪽에 도움이 되는 언행을 하는 것은 ‘법률가적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 공정한 재판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판사는 친절하고 싶어도 친절하게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끝으로 위 사례에서 시골노인과 깡패 중 누가 돈을 빌려주었는지 알 수 있는가? 보지 않은 사실을 판결 내려야 하는 판사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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