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우리의 옛 모습 -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사라져 가는 우리의 옛 모습 -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 승인 2017.01.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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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경 하브루타 도서관 관장
TV 요리 프로를 보고 만두를 만들기로 했다. 가족 카톡방에 ‘금요일 7시, 만두 만들어요. 약속 잡지 마세요.’라고 올렸더니 모두 좋단다. 함께 만드는 만두는 금방 수북이 쌓였다. 맛도 기대이상이다. 요즘은 흔히 먹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만두는 일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설날 떡국과 함께 먹는 명절 음식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겨울이 되면 우리를 데리고 만두를 잘 만드셨다. 찰지게 치댄 밀가루 반죽은 널따란 판에 올려놓고 마른 밀가루를 뿌려가며 홍두깨로 죽죽 밀었다. 여러 번 홍두깨가 지나가고 만두피가 얇아지면 다음은 주전자 뚜껑으로 꼭꼭 찍기. 그제야 동글동글 새겨진 만두피를 하나씩 뜯어내어 만두를 빚었다. 크기도 여러 가지, 모양도 여러 가지. 한 눈에 봐도 어른이 만든 만두와 아이가 만든 만두는 차이가 났다. 다 만든 만두는 그날 푸짐한 저녁식사가 되었고 옆집 고모네로, 이웃으로 나눠먹기도 하고 며칠 동안 잘 보관하여 두고두고 먹었다.

설날을 앞둔 이맘때쯤이면 읽어주기 딱 좋은 그림책이 있다. 바로 ‘손 큰 할머니 의 만두 만들기’(재미마주). 무엇이든 엄청 많이 하는 손 큰 할머니는 해마다 설이 되면 숲 속 동물들과 만두를 빚는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아 집에 갈 때는 한 소쿠리씩 싸주고도 남을 만큼 많이 하는 설날 만두다. 올해도 할머니는 며칠 밤을 새우며 동물들과 만두를 빚지만 언덕만큼 솟은 만두소가 줄지 않는다. 마침내 할머니와 동물들은 만두피를 넓게 깔고 그 안에 만두소를 몽땅 쏟아 붓고 세상에서 가장 큰 만두를 하나 만든다. 섣달 그믐밤 밤은 깊어 가고 만두는 익어간다. 다음날 모두 만둣국을 먹고 한 살씩 먹는다.

글과 그림에 참여한 채인선, 이억배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다. 대표작을 들라면 채인선 작가는 ‘내 친구 최영대’, ‘아름다운 가치사전’을 이억배 작가는 ‘솔이의 추석이야기’,‘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을 들 수 있겠다. ‘손 큰 할머니의 만두만들기’는 2001년에 만들어졌는데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양질의 그림책에 밀리지 않고 아직도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채인선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유머와 재치가 한몫을 하고 거기다 이억배 작가의 생동감 있고 해학적인 그림이 글과 함께 쿵덕쿵덕 짝을 이루며 압권이다.

좋은 그림책의 조건은 여러 가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할 수 있고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고무 털신과 털실로 짠 스웨터, 몸빼 바지를 입은 할머니는 8, 90년대 시골 할머니의 모습이다. 할머니는 힘이 무척 세고, 억척스럽다. 누구에게나 베푸는 걸 좋아하고 싱글벙글 긍정의 에너지로 때론 엉뚱하고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민화 속 호랑이와 토끼를 닮은 친근한 어린 동물들의 천진난만하고 장난스런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이를 닮아 사랑스럽다.

아이들은 신이 나고 엄마 아빠들은 마지못해 참석하고, 처음엔 신났지만 줄지 않는 만두소에 지쳐 모두 파김치가 되어간다. 결국 세상에서 제일 큰 만두를 함께 만드는데 그 유쾌한 장면에 감정이입이 되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만두 만들기가 끝나고 섣달그믐밤 만두가 익어갈 동안 장작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온기를 나누는 장면은 몽환적이며 환상적이다. 그제야 만두 만들기가 먹는 것 이상의 의미 있는 일이란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거기엔 나눔과 인정, 협동과 소통 그리고 놀이와 몰입의 즐거움까지 있다.

시대가 바뀌니 명절의 풍속도 많이 바뀌고 번거로운 것들은 사라졌다. 복조리를 사서 한 해의 복을 축원하던 것도, 체를 걸어 야광귀를 물리치던 일도, 신발을 감추고 그믐밤 잠을 자는 아이의 눈썹을 하얗게 칠하던 일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일가친척이 모이고 세배를 드리는 일이다. 번거롭지만 TV, 스마트 폰을 물리치고 가족과 함께 만두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만두, 잊히지 않는 섣달 그믐밤이 될게다. 나에겐 아직도 어릴 적 만두 만들던 기억이 감홍시처럼 빨갛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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