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제국’의 비운
‘영원한 제국’의 비운
  • 승인 2017.03.0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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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前 중리초등학교 교장
2017년 1월 3일 저녁 뉴스에 ‘특검, 비선 실세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 학점을 준 류철균 교수 구속’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그날 저녁 서재 책꽂이 맨 위 칸에 있는 류철균(필명 이인화) 장편소설 ‘영원한 제국’을 펼쳤다. 표지 안쪽에 ‘사랑하는 아들 섭에게(94.7.18. 엄마가)’라는 만년필로 또록또록하게 적은 글씨가 나왔다.

맏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해 엄마가 축하한다는 뜻으로 사준 책이었다. ‘영원한 제국’은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었다. 엄마는 서점에 가서 그 책을 샀었다. 그리고 만년필로 엄마의 이름을 쓰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글자를 쓰다가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단다.

‘영원한 제국’의 책장을 넘겼다. 누렇게 색깔 바랜 나뭇잎이 한 장 끼어 있고 볼펜으로 정성스레 물결선을 그은 부분이 보였다. 맘에 각인시키고자 한 구절인 듯하다.

‘…주공의 이야기는 이인몽에게 세상에는 운명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 동요하지 않고 운명을 짊어지려는 용기다.’

아마 운명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류철균이 ‘영원한 제국’에서 과연 말줄임표(…)로 동요하지 않고 운명을 짊어지려는 용기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무리 빌고 몸을 굽히고 피해도 나는 내가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서서 당해 주어야 한다.’

작가 류철균은 조교에게 정유라의 답안지 작성을 지시하면서 운명보다 더 강한 것을 짊어지겠다는 용기를 의식했을까? 그리곤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긍정하였을까? 운명엔 당당하게 서서 당해 주어야 하는 것이 필연임을 오늘의 시점에서 깨달았을까?

류철균은 열한 살까지(초등학교 5학년) 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지지리도 못난 아이였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그 때 안동 예안의 왕고모 소상에 갔을 때, 골방에서 진보 아지매에게서 ‘나랏님을 독살한 숭악(凶惡)한 놈들’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열한 살 류철균이 처음 듣는 정조 임금의 독살설이었다. 훗날 ‘영원한 제국’의 탄생 동기가 됐다.

책장을 넘겼다. 다 부서진 또 다른 나뭇잎의 책갈피가 나왔다. 그 곳에도 아들이 그어 놓은 물결선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에게 선한 것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악하기 마련이다. 다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모두 살려고 하며, 더 잘 살려고 한다는 사실뿐이다. 겸허하게 몸을 낮추어 살기에 힘쓰고 인정(人情)이 이끄는 바에 따라 힘이 허락하는 한에서 남을 살리는 것, 그것이 인간도이다.’

아들은 책을 읽다가 ‘인간도’라는 말에는 네모로 두 번이나 테두리를 만들어 놓았다. 위의 글에 왜 물결선과 테두리를 하였는지 궁금하다.

작가 류철균은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으리라. 비선 실세 최순실을 만나고 학생 정유라를 만났다고 한다. 인정이 이끄는 바에 따라 힘이 허락하는 한에서 남을 살렸으니 이것을 인간도라 말한다면 자기모순이다.

아들도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공부가 힘들었던지 집을 뛰쳐나가겠다고 했다. 그런 아들을 붙잡고 “뭐래도 너는 내 아들이다.”며 울타리를 쳐준 것은 가족이었다. 불혹의 아들이 남들 선호하는 직장을 나와 올해 6급 공무원에 합격했다. 미혹하지 않았으면…. 책장을 덮었다. ‘운명을 짊어지려는 용기’와 ‘인간도’를 생각해 보았다. 책의 표지에 시경 빈풍편에 나오는 ‘올빼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책꽂이에서 시경을 꺼내 ‘치효’를 읽어봤다.

‘올빼미야, 올빼미야/내 자식을 잡아먹었거든/내 둥우린 헐지 마라/알뜰살뜰 정성으로 길러냈던/어린 자식 불쌍하다./….’

이 글은 주공이 박해를 받으면서 읊었던 시라고 한다. 이 시에 ‘어떤 선한 경우에도, 다른 어떤 경우에는 악하기 마련이다.’라는 명제를 붙여봤다. 그래도 순조롭지 못한 슬픈 운명이다. 분명 ‘영원한 제국’의 류철균은 비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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